광고
정치/선거경제/복지미디어전쟁국제정치.경제민족/통일사회/사법군사/안보문화/스포츠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전체기사보기 교육/과학   고대사/근현대사   고향소식/해외동포   포토/해외토픽   자유게시판  
편집  2021.05.13 [21:30]
국제정치.경제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세계 경제공황의 역사적 배경과교훈/강철구교수
열강의 파시즘적 국가이기주의 회귀조짐을 엄중경계해야
 
이화여대 사학과 강철구교수 기사입력 :  2008/11/29 [17:57]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밴드
 
 
 
 
▲ 이화여대 사학과 강철구 교수: 편집부
세계 경제공황의 역사적 배경과교훈 





                                 경제공황의 배경




   경제공황이란 영어로 great depression이다. 디프레션은 보통 디플레이션 deflation과 혼동되기 쉬우나 서로 다른 개념이다.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의 반대말로 통화축소를 의미한다. 반면 디프레션은 높은 실업률, 임금삭감, 물가하락, 기업 활동의 위축을 동반하는 경기침체를 의미한다.

   경기침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때문에 경제가 호황과 불황국면을 순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황 뒤에는 불황이 오고 반대로 불황 뒤에는 호황이 오기 마련이다. 확장된 생산만큼 소비가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과잉생산 국면이 지나면 다시 경기가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 50-55년을 단위로 하는 콘트라티에프 주기 등 경기순환에는 여러 주기들이 있다. 그럼에도 1929년의 디프레션을 경제공황, 또는 대공황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하고 장기적이며 전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정도로 큰 영향을 남겼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는 1차대전으로 인해 침체되었다가 20년대 초부터 다시 살아나 20년대 내내 번영을 누렸다. 특히 미국경제가 그랬다. 미국은 1923년부터 29년까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이 사이에 산업생산은 두 배로 늘었고 gdp는 40%가 증가할 정도였다. 미국이 전시의 피해가 없었던 반면 유럽국가들에게 군수품이나 식량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나 모든 산업 부문이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농업부문은 20년대를 통해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전시의 증가된 수요에 힘입어 경작지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그렇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유럽에서의 농업생산이 회복되자 과잉 생산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게다가 1925년에서 29년까지는 평균 작황이 유지되었으므로 그 심각성은 더했다.

 

   그래서 1924-29년 사이에 국제 밀 가격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세계의 농업물가지수도 1919년의 226에서 1929년에는 134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세계 많은 지역의 농민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쳤다. 부채를 지고 큰 농토를 장만한 농민들은 거의 파산상태에 빠지고 일반 농민들의 구매력도 크게 떨어졌다.

     미국의 경우 많은 농민들은 전쟁시의 호황을 틈타 부채를 얻어 농장을 대규모화하고 트랙터 등을 구입하여 농업을 기계화했다. 그러나 곡물가가 하락하자 대출금을 갚을 능력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이 부채에 허덕이게 되었다. 광산물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전시 수요로 광산에 대한 투자가 많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이 끝나며 광산물가도 폭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20년대 후반 유럽을 포함한 세계경제의 호황은 그렇게 건전한 것은 아니었다. 주로 미국자본의 수출과 미국 수입시장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은 미국경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1924년부터 미국자본이 독일로 유입되어 독일경제를 크게 회복시켰고 그것이 다시 유럽전체의 경기상승을 이끌었던 것이다. 

 

   1929년 이전에도 유럽경제는 미국투자자들이 미국 주식시장의 호황에 편승하기 위하여 자금을 빼가기 시작하자 점차 나빠지는 조짐을 보였다. 그리고  미국의 주식투자 붐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호황기의 통화팽창으로 28년부터 달아오른 주식시장이 1929년 10월 24일 돌연히 붕괴했기 때문이다. 마의 목요일이라고 불린 이날 천정까지 올랐던 주식의 거품이 꺼지며 호황 국면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는 미국의 주식투자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으며 점차 실물경제 부문으로 파급되었다. 또 미국경제가 전 세계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큰 비중 때문에 이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발전했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대공황은 생각보다는 천천히 진행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처음에 그것이 세계 경제의 대파국을 가져올지 잘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에서의 경제공황의 직접적 원인




   이는 여러 요인의 결과이다.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20년대 미국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했다는 것이다. 1920년대에 1인당 평균 가처분 소득은 10%가 올랐으나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소득은 75%가 올랐다. 가장 부유한 국민 1%가 국부의 60%를 점유하고 있었다.

   최상층 6만 가족의 예금액은 가장 가난한 2,500만 가족의 예금액보다 많았다. 국민소득의 더 많은 부분이 점점 상층에게 집중되며 경제는 이들의 소비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상층계급 소득의 많은 부분은 내구소비재가 아니라 각종 투자뿐 아니라 사치품 구입, 주식 투기에 흘러 들어갔다.

 

   경제가 호황을 보이고 기업 이익이 임금보다 빨리 늘었으므로 기업가들은 여분의 이익을 설비확장에 투자했다. 그 결과 소비자들이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생산을 했다.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가장 커진 부분은 20년대의 소비경제를 이끈 자동차 산업과 건설업이다. 다른 산업부문은 이에 많이 의존했다.

   자동차, 철강, 건설 등에서 과잉투자가 이루어지며 1928년과 1929년에 판매고가 이를 따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재고가 늘고 생산이 줄어들며 고용도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 노동자, 중산층 가정들은 1928-9년의 높은 경제 성장을 지속시킬만한 경제여력이 없었다. 소비를 늘릴 수 없었던 것이다.

 

   농민들은 호황기의 이익에 참여하지 못했다. 농산물가가 1차 대전 이후의 하락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1921년 이래 계속 낮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소득은 1919년에는 전체 국민소득의 16%를 차지했으나 1929년에는 9%로 줄어들었다. 그뿐 아니라 농업부문의 과잉생산은 20년대 내내 만성적인 문제였다. 이렇게 소득이 크게 줄어들며 농민들의 구매력은 20년대 내내 낮은 수준에 있었다.

   노동자들의 임금도 20년대에 10% 정도 올라갔으나 그것이 전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년대 초보다 떨어졌다. 노동절약적인 새 기계들이 도입되며 기술적 실업이 생겼다. 실업율은 20년대 내내 비교적 높아서 7%를 유지했다. 실업보험이나 연방정부의 복지계획이 아직 없었으므로 지속적인 실업은 빈곤과 구매력의 저하를 의미했다.

 

   실업자는 1929년 가을에 약 300만 명이었는데 직물, 석탄, 벌채, 철도 산업 등 사양산업에서 나타났다. 이 산업들은 모두 과잉투자, 수요 감소, 비효율적인 경영으로 고통을 겪었다.  

   미국경제의 다른 내재적인 취약성은 국제경제 정책의 영역에도 있었다. 1차 대전 동안에 유럽국가들이 미국의 은행이나 국고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빌렸기 때문에 미국은 세계의 지도적인 채권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1920년대의 상황에서 자신의 무역정책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채무국가는 외채를 물기 위한 외환을 필요로 하므로 수입보다 많은 액수를 수출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20년대 내내 주된 유럽국가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해 높은 관세 장벽을 쌓고 무역흑자를 보았다. 자국 산업이나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기업가나 정부가 부채를  물고 미국상품을 사도록 더 많은 돈을 대출해 주었다.

 

   공황이 시작되자 손실을 보게 된 미국의 채권자들은 새로운 차관 공여를 거부했고 만기가 된 차관들은 더 이상 연장을 해주지 않았다. 더 이상 돈을 얻지 못하게 된 외국의 채무자들은 파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연히 미국 상품의 수입이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수출도 급락했다. 많은 곡물을 수출하고 있던 농민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증권시장의 붕괴와 함께 급격하게 축소된 국제무역이 대공황의 주된 원인의 하나이다.

      




                                  공황의 전개 




   1929년 11월말까지 주가는 40%나 하락했다. 그 후 주가는 지속적으로 떨어져 1929년에서 1933년 사이에 다우존스 공업지수는 381에서 41로 하락했다. 

   1929년에서 1933년 사이에 약 10만 개의 기업의 파산했고, 투자는 70억 달러에서 20억 달러로 감소했다. 기업들의 총 이익은 1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떨어졌다. 경제규모가 이전보다 절반 정도로 줄어들며 gnp는 800억 달러에서 420억 달러로 떨어졌다. 도매물가는 40% 떨어졌고 근 6,000개의 은행이 파산했으며 이와 함께 수백만 명이 저축한 250억 달러의 예금도 사라졌다. 

 

   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실업자 수는 300만 명이었으나 그 후 매주 10만 명이 일자리를 잃어 1933년 3월에는 전체 노동력의 1/4인 1,3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파트타임으로 고용되거나 임금 삭감을 당했다. 그리하여 미국 노동력의 절반가량이 실업상태에 있거나 불완전 고용상태에 빠졌다. 노동임금은 이 4년 동안에 40%가 떨어졌다.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경제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채용했다. 그는 증권시장의 파국이 전체 경제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업가, 농민, 노동계 지도자들과 함께 생산수준과 임금수준을 유지하도록 합의했다. 

또 소비를 늘리기 위해 의회의 도움으로 소득세를 인하했으며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이자율을 낮추도록 했다. 또 불경기가 심한 지역에서는 연방정부의 공공사업을 확대했다. 이는 큰 재정 적자를 가져왔다 1931년에서 1933년 사이에 그 규모는 65억 달러에 이르렀고 국채도 160억 달러에서 225억 달러로 커졌다.

 

   후버의 이런 시도는 실패했으나 경제를 회복시키고 기업 활동의 쇠퇴를 막기 위해 세금을 인하하고 이자율을 낮추고 공공사업을 확대하는 정책을 사용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는 나중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한 뉴딜 정책과 본질에서 같은 것이다. 뉴딜 정책이 그 규모에서 훨씬 커졌을 뿐이다.   

   경제사정이 나빠지자 미국 투자자들은 해외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국자본에 가장 많이 의존하던 독일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 독일경제가 좌초하자 독일경제와 전체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유럽 다른 나라들의 경제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공황의 진전에 따라 미국의 상품시장도 축소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가 미국에 대한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세계 경제에도 타격을 가했다. 게다가 미국은 수입을 줄이기 위해 1930년에 스무트-홀리 법을 통해 관세를 인상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세계가 온통 경제공황에 휩쓸리게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의 진전




  미국자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독일경제는 미국의 공황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1929년 말에서 1930년 초 사이에 미국이 단기자본을 회수하며 어려움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1931년에 가면 금융시장이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5월11일에 오스트리아 신용기금이 도산했고 6월에는 다름슈타트 국민은행이 지불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두려움에 가득 찬 투자가들은 이제 어느 곳에서건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려 했다. 많은 은행들이 충분한 지불금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파산했고 세계의 금융제도가 위기에 몰렸다. 그리하여 금융공황은 산업공황으로 진전되었다.

 

   독일의 실업자수는 1929년 여름에 80만 명이었으나 30년 12월에는 3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31년 7월에는 550만으로, 1932년 초에는 전체 노동력의 35%인 600만 명에 달하여 엄청난 사회불안을 야기 시켰다. 산업생산도 50% 수준으로 떨어졌다.

   1930년 3월에 헤르만 뮐러의 사회민주당 중심의 연립정권이 실업수당 삭감 문제로 붕괴한 후 중앙당의 브뤼닝이 다시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브뤼닝은 고전 경제학의 가르침에 따라 국가지출을 줄이고 임금을 삭감하고 실업수당을 줄임으로써 재정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상황을 악화시키고 독일인의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켰다.

 

   많은 투자가들이 영국 파운드화에 대해 금태환을 요구했으므로 영국 중앙은행도 버티지 못하고 1931년 9월에는 태환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1차대전이 끝난 후 국제 금융제도를 다시 금본위 위에 세우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국제무역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고 디프레션을 더 악화 시켰다. 모든 나라가 수출을 늘리기 위해 환율전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 경제는 좀 덜 한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영국의 1929년도 실업자수는 120만 명이었으나 1932년에는 노동력의 22%인 270만에 이르렀다. 그리고 1936년까지도 200만 명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1929년에 정권을 잡은 노동당의 맥도날드 연립정권은 공황의 여파로 무너지고 1931년에 보수당이 중심이 된 연립정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스탠리 볼드윈의 정부는 디플레이션 정책을 시행했다. 정부지출은 축소되고 복지수당도 감소했으며 보호관세가 도입되었다. 기업가들은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 가도록 방치되었다. 그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프랑스는 다른 나라보다는 공황에 뒤늦게 휘말렸다. 그러나 불황이 한번 닥치자 프랑스에 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38년까지도 회복의 조짐은 없었고 산업생산은 1930년, 31년 수준을 밑돌았다. 프랑스에서도 정부는 경기침체를 막으려고 디플레이션 정책을 시행했다. 

   경기침체는 선진국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후진국들은 선진국의 수입이 줄자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1932년에 상황은 가장 악화되었다. 1929-32년 사이에 세계의 생산고는 38%, 무역은 66%가 감소했다. 전 세계의 실업자수는 3천만 명을 헤아렸다. 그 외 반실업자의 수는 말할 수도 없다. 높은 실업률은 수요를 크게 하락시키게 되고 그리하여 경제의 하향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공황에 대한 대안들




   공황이 가져온 대규모의 실업과 전반적인 경제침체는 각국의 정부로 하여금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했다. 엄청난 실업자의 대군과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빈곤선 이하의 사람들이  각 나라의 정부를 압박했던 것이다. 과격 정당들이 생겨나고 이들이 무능한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부들은 과격한 정책을 취하기를 거부하고 온건한 구호정책에만 머물렀다. 그것은 그들이 고전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에 따랐기 때문이다. 고전경제학에서 경제는 순환적인 것이었다. 경기가 활황을 유지한 다음에는 불황기가 오고 그 다음에는 다시 호황기가 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불황이 오면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은 없었다. 단지 호경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공황의 파국적 성격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국민들의 고통이 너무 컸으므로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일부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방법을 원했다. 스탈린의 소련이 그 모델이었다. 그러나 계획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과격한 방법이었다.

   코포라티즘적 방법을 추구한 사람들도 있다. 파시스트들이 그렇다. 이 개념은 공황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것으로 경제의 각 부문에 조합(코포레이션)을 조직하고 이를 기업가 대표, 정부 대표, 노동자 대표의 협의에 의해 운영할 것을 주장했다. 이 단위가 상품가격과 임금을 통제하고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도 자유시장 경제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해법이었으나 이탈리아나 독일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그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른 방법은 영국의 경제학자인 j.m.케인즈가 제시한 유효수요이론이다. 케인즈는 공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과도한 공급이라기보다는 불충분한 수요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각 나라의 정부들이 경제에 직접 개입하여 화폐 공급을 늘리고 공공사업을 시행하고 조세정책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함으로써 경기를 부양시키도록 충고했다. 이를 위해서는 적자재정도 감수해야 했다. 1936년에 쓴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에 그의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케인즈의 처방은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의 뉴딜정책 




   미국에서도 경제가 나빠지며 사회적 혼란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은색 셔츠단이 유럽의 파시즘을 본받아 강력한 파시스트 정권을 세우자고 대중을 동원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런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빨리 경제가 안정되어야 했다.

   1933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채용했다. 이는 케인즈의 경제이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간섭정책을 의미했다. 혼합경제를 추구하는 이런 방식은 경제의 자유를 중시해 온 미국적 전통에는 배치되는 것이나 당시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구호(relief), 경기회복(recovery), 개혁(reform)의 3r 정책을 목표로 정부는 우선 대통령 취임과 함께 전국적인 4일간의 은행 휴업을 단행하고 5억 달러를 출자하여 연방 비상구호청을 설립하는 등 긴급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차차 경제회복을 위한 다각적인 정책 시행에 나섰다.  

   1933년에 농업조정법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과잉생산에 의한 농산물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생산량을 축소하고 과잉 생산된 농산물이나 축산물은 정부가 보상을 해주고 폐기처분했다. 그리고 그 보상금은 제분업자, 농산물 가공업자에 대한 세금 인상으로 충당했다. 채무를 진 농민들에게는 토지를 담보로 정부가 장기 저리 융자를 해주었다.

 

   실업자 구제를 위해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실시했다. 공공사업추진청을 만들어 학교, 도로, 수로, 공원 등을 만들었다. 민간자원보존단은 사방사업, 조림 등의 자연보호 사업을 벌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구제했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1933년에 시작된 테네시강 유역 개발사업이다. t.v.a.로 알려진 이 사업은 남부의 테네시 강과 그 지류에 여러 개의 댐과 발전소들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는 경기부양을 위한 것이었고 이 사업으로 부근의 7개 주가 혜택을 보게 되었다.  

 

   전국산업부흥법(nira)은 노사합의에 의해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정책이다. 산업별로 임금, 노동시간(특히 최저임금, 최고 노동시간)을 결정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노조의 조직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했다. 이는 노동계급에 적대적이었던 1920년대의 공화당 정부와는 전연 다른 태도였다. 이렇게 정부가 노사간의 협동을 주도함으로서 점차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를 수정하는데 성공했다.

   그 밖에 와그너법에 의해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강화했다. 사회보장법에 의해서는 고소득과 상속재산에 대한 중과세, 또 누진법인세를 도입했다. 또 노령과 실업에 대비하여 고용인과 고용주가 공동 부담하는 노동자들의 보험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사회적 형평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혁신적인 정책이 반발을 불러오는 것은 당연했다. 우익에서는 이것을 사회주의라고 비난했고 좌익에서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미온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또 1935년에 대법원은 전국산업부흥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시했다.  

   루즈벨트는 1937년에 재선에 성공하자 우선 대법원의 개편에 착수했다. 대법원이 보수세력의 아성으로서 많은 뉴딜 입법을 위헌으로 판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성공함으로써 보수세력의 저항을 극복했다.  

 

   이 시기에는 노조조직에서도 직능별 노조(afl)의 행동통일이 불가능했으므로 산업별노조(cio)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기업주들과의 격렬한 투쟁 끝에 cio가 조직되었고 이는 30년대 말에는 크게 확대되었다. 당시 노조원 900만 명 중 afl이 400만, cio가 350만으로 거의 대등한 세력이 되었다. 나머지는 독립노조 소속원들이었다. 이리하여 노동계급의 힘이 과거보다 많이 커질 수 있었다.

  그러나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다. 1938년에 다시 심한 불경기가 오며 실업사태가 야기되었다. 장기간의 경기침체는 결과적으로 2차대전이 터지고 군수경기가 살아나며 서서히 회복되었다. 어쨌든 미국은 뉴딜정책을 통해 혼합경제 체제로 나아갈 수 있었고 그리하여 파시즘, 볼세비즘 같은 극단적인 체제를 피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집권과 독일의 재무장정책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된 것도 경제공황 탓이다. 1929년 이전에만 해도 고작 원내 12석을 차지하고 있던 나치당이 경제공황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급격하게 세를 불린 것이다.

    이는 1930년 3월에 경제공황으로 사회민주당의 헤르만 뮐러 내각이 무너지며 의회 내에 안정된 다수파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의 중심이 사라지고 법령이 헌법 48조의 대통령 긴급령에 의해 발포될 수밖에 없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더 이상 불가능함을 의미했고 의회의 이런 무능함은 극심한 경제침체와 실업으로 고통을 받던 대중들을 실망시켰다. 그리하여 나치당과 공산당과 같은 과격정당들이 크게 세를 불렸다.

   그 가운데서도 나치당인 독일민족사회주의노동당의 정치적 성장은 화려하여 의석수가 1930년 9월 선거에서 107석으로 크게 늘어났고, 1931년 7월에는 230석을 얻어 원내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는 즉각적인 해결을 주장하는 과격한 구호에 의한 것이다.

 

   결국 1933년 1월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에 지명됨으로써 권력 장악의 길로 들어섰다. 이렇게 1933년에 집권하며 곧 독재체제를 수립한 나치당은 군축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등 도전적인 외교정책을 폈다. 또 광범한 재무장 정책을 시작했다. 재무장정책은 아우토반의 건설 등 건설사업과 함께 독일의 유효수요를 증대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자본과 노동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통제와 경제적 자급자족을 이루려는 정책 기조도 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의 경제정책도 미국의 뉴딜 정책과 거의 비슷한 효과를 냈다. 경제가 점차 회복되어 1938년에 가면 구매력이 1929년 수준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실업자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집권 시에 600만 명에 달하던 실업자 수는 1년 후에 370만 명으로 줄었고 1936년 1월에는 25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1937년 여름이면 거의 완전고용 수준에 이르렀고 1939년 1월이면 노동력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독일이 취한 공황 대책은 미국의 것과 거의 유사하다. 국가의 통제가 훨씬 더 강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러나 독일의 재무장정책은 결과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어졌다. 히틀러가 영토확장을 통한 대제국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     론




   세계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공황이 야기한 광범한 위기에 대처할 정치적이거나 지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황이 심각한 경제, 사회적, 나아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고 국제 공조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이제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각 나라 정부들은 과격한 정책들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제는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갔다. 금본위제도가 포기됨으로써 환율을 정할 국제적 기준이 사라졌다. 각 나라들 사이에는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이기 위해 환율을 낮추려는  환율전쟁이 벌어졌다. 또 너도나도 관세장벽을 설치하여 수입을 줄이려고 애썼다. 이는 그때까지의 자유무역적인 흐름을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체제가 사회, 정치적 혼란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1차대전 이후 만들어진 많은 민주체제들이 무너지고 그 대신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스페인만이 아니라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런 상태에 빠졌다.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같이 민주제도가 그 나름으로 정착된 나라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보전할 수 있었으니 이런 나라들에서도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같은 극단주의 운동들이 맹위를 떨쳤다.  

 

   대공황은 실업과 빈곤을 양산함으로써 개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계급적, 인종적 갈등을 야기 시켰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의 급격한 성장은 그 결과이다. 국제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국가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특히 파시스트 국가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공황이 전쟁을 야기 시켰으나 다른 한 편에서 전쟁이라는 대파국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http://www.minjokcore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족신문
 
 
주간베스트
  개인정보취급방침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Copyright ⓒ 2007 인터넷 민족신문. All rights reserved.
Contact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