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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하루키회고록] 한-일 협정 반대 위해 역사학자들 나섰건만
 
한겨레 기사입력 :  2010/07/2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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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하루키회고록] 한-일 협정 반대 위해 역사학자들 나섰건만
한겨레 한승동 기자기자블로그
» 일본 지식인사회에서 베트남전쟁 반대와 함께 한일협정 반대 움직임이 일고 있던 1965년 4월19일 ‘러시아사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오른쪽부터 필자, 쇼노 아라타, 구라모치 슌이치, 이마이 요시오.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⑧재야 역사학연구회 운동

1963년 5월 나는 일본 최대의 재야 역사가단체인 역사학연구회의 위원이 됐다. 위원장은 마르크스주의자인 일본사가 도야마 시게키씨였다. 도야마씨는 5월 대회에서 일본인의 조선관은 “일본인 의식수준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도야마 위원장 아래서 나는 그 다음해에도 위원으로 일했다. 야마다 쇼지, 가지무라 히데키씨가 새로 위원이 됐다. 야마다씨도 조선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인 일본사가였으나 가지무라씨는 일본의 대표적인 소장 조선사가였다.

가지무라씨는 1935년생이니 나의 2년 선배다. 당시 그는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조수였다. 1961년에 창립된 재야의 일본조선연구소에 처음부터 참여했다. 야위고 수줍어하는 듯한 표정이지만 둥근 안경 너머의 눈은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가지무라씨는 그때도 그 뒤에도 항상 내게 친절하게 조선문제를 가르쳐 주고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해 주었다. 나중에 숨지기 직전에는 함께 한국 민중운동을 소개하는 3권의 책을 공동으로 내기까지 했다. 1989년 그가 타계했을 때 내가 조사를 읽었다.

가지무라씨가 내게 권한 책이 일본조선연구소의 <일·조·중 3국 인민연대의 역사와 이론>이었다. 안도 히코다로, 데라오 고로, 미야타 세쓰코, 요시오카 요시노리 4명의 이름이 저자로 표지에 실려 있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일본의 조선지배 전 과정, 민비 시해로부터 일본군 위안부제도까지를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책은 “일본제국주의가 자행한 일은 어떤 형태로든 사죄하지 않으면 안되고, 어떻게든 배상해야 합니다.”라고 지적했다. 과거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은 나도 이미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배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나로서는 새로운 것이었다.

65년 5월 나는 3년째 역사학연구회 위원이 됐다. 가지무라, 야마다 두 사람은 위원직을 떠났다. 위원장은 서양 고대사 전공 오타 히데미치씨로 바뀌었다. 나는 전 위원인 가지무라씨와 상담하면서 역사학연구회의 일한조약(한일협정) 반대운동을 추진했다.

그해 2월17일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외상)은 조약을 가조인하기 위해 방한했을 때 “양국간 오랜 역사 가운데 불행한 시기가 있었던 것은 실로 유감이며,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읽었다. ‘불행한 시기’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시돼 있지 않았고 ‘유감’이란 ‘아쉽다’는 의미로, 사죄의 뜻은 포함돼 있지 않다. 그의 도착 뒤 시작된 교섭에서 기본조약 제2조는 한국제안으로 ‘already(이미)’라는 한마디를 넣기로 해 마침내 타결됐다. 한국쪽이 병합조약은 애초부터 무효였다고 해석할 수 있고, 일본쪽은 계속 유효했으나 ‘이미’ 1948년엔 무효가 됐다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국은 13년 동안 싸워서 겨우 그런 수준의 타협을 얻어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전년도 6월3일에는 전국에서 학생이 들고 일어나 서울에서는 대통령 관저를 포위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000명을 체포했으며,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베트남전쟁쪽에 사람들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65년 1월에 간행된 이와나미 신서, 오카무라 아키히코의 <남베트남전쟁 종군기>는 압도적인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2월에는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했고 3월에는 미 해병대가 다낭에 상륙했다. 텔레비전 영상은 숨막힐듯 무참한 미국의 침략전쟁 모습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60년 안보투쟁중에 만들어진 ‘소리없는 소리회’의 쓰루미 슌스케씨와 다카바다케 미치토시씨 등이 북폭반대 데모를 벌이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뭐든 보자>의 저자로 한국여행에서 막 돌아온 작가 오다 마코토씨와 상담한 결과 그를 대표로 세운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헤이렌)을 출범시키게 됐다. 첫 데모를 단행한 것은 65년 4월24일이었다. 이런 전쟁은 용납할 수 없다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평화운동의 길을 열어준 역사적인 출발이었다.
 

나도 5월에 발행된 <러시아사 연구> 12호 편집후기에 암담하고 우울한 속마음을 다 털어놨다. “현대사의 사건은 종종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의 최근 1년의 상황은 드물게 볼 정도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오늘날 베트남에서 미국 제국주의체제의 비인간적인, 야만적인 얼굴은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6월22일 도쿄에서 한일협정 본조인이 이뤄졌다. 나는 그날 저녁 전년도에 결혼한 아내를 꼬드겨 조인식이 열린 총리 관저 근방까지 가봤다. 큰 데모는 없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기동대 방패 너머로 총리 관저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가을이 왔고, 나는 가지무라씨의 도움을 받아 역사학연구회 차원의 한일협정 반대집회를 여는 데 성공했다. 65년 9월11일 ‘일한조약에 반대하는 역사가 모임’이 학사회관 분관에서 열렸다. 보고는 후지와라 아키라의 ‘아시아의 반인민적 군사체제와 일한조약’과 가지무라 히데키의 ‘일한경제협력의 본질’, 이 두 가지에다 통일조선신문사의 엄묵철씨 보고 ‘한국의 민중운동 동향’이 추가됐다. <통일조선신문>은 일본에 망명한 이영근씨가 59년에 내기 시작한 신문으로, 한국계도 북한계도 아닌 제3세력의 민중운동을 지향하고 있었다. 엄묵철은 편집부원 이승목씨의 가명이었다. 그는 내가 번역한 베라 피그넬의 회상록 <러시아의 밤>을 읽고 있었다. 그는 당시 한국은 나로드니키 시대의 러시아와 같다고 내게 말했다. 역사가 모임은 내가 원안을 쓴 성명을 채택했다.
 
“한국의 역사가 3개 단체의 공동성명을 포함해 한국인민 각계각층의 선언문, 성명이 일치해서 지적하는 것은 일한조약의 매국적, 굴욕적 성격이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 먼저 이 조약이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를 단죄하는 정신으로 체결되지 않은 데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심각한 반성을 요하는 지적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조선인민의 자주적·민주적 지향을 압살하고 그들한테서 나라와 민족어를 빼앗은 일이었다. 조선인민에게 가해진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동시에 타민족의 예속에 동원된 일본국민한테서는 민족적 멸시감이 자라나 그 때문에 일본국민의 정신적 성장도 왜곡됐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는 20년 전에 끝났으나 일본국민의 정신 문제로서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일한조약을 추진하는 일본정부는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를 긍정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조약 자체도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성명에는 이시모타 쇼 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또 당시 일본조선연구소의 데라오 고로 등이 추진하고 있던 방침의 영향도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 입장은 식민지지배의 반성이라는 계기를 갖지 못한 일반 혁신세력 운동속에서는 고립돼 있었다.
 
정부는 태도를 돌변했다. 비준국회에서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명확하게 답변했다. “옛 조약 문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은 제가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당시 대일본제국과 대한제국 간에 조약이 체결됐던 겁니다. 이것이 여러가지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조약인 이상 이건 양자의 완전한 의사,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됐다는 건 굳이 제가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 조약은 각기 효력을 발생해왔습니다.”(11월19일 참의원 본회의)
비준안건은 12월4일의 참의원 일한특별위원회에서 강행 채결돼 11일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날 밤 국회 인근 광장에 모인 데모대는 강행 채결은 무효라며 한일협정을 승인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들 속에 있던 나는 어쩐지 공허한 기분이었다.

»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 없이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경제협력을 하기로 한 한일협정은 한국국민에게 지울 수 없는 불만을 남겼다. 일본은 과거역사를 반성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한일국교 정상화를 토대로 한국정부는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죄과를 범했다. 일본한테서 받은 경제협력은 일부는 한일 유착구조를 통해 부패오직의 온상이 됐으나 대부분은 포항제철소 등 한국경제 발전에 활용됐다. 일본이 제국주의적으로 다시 한국경제를 지배할 것이라는 우리의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한국에서는 한일협정 체결로 초래될 새로운 상황에 진지하게 대처하기 위한 지식인 토론장을 만들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창작과 비평>이라는 계간 종합지 주간을 맡은 사람은 나와 같은 38년 1월생인 백낙청씨였다. 우리(일본)쪽은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그 뒤에 전개될 한일관계, 한국사회의 변화 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통일조선신문>을 몇년간 구독하고 있었으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번역/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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