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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적으로 일본 대사관은 대(對)한국 정보수집의 최전선이다
이 대화를 엿들은 한국인 직원은 “섬뜩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고 회고했다.
 
함영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기사입력 :  2014/08/1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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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선의로 접근한 노무현, 독도로 뒤통수 친 일본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취임 후 5월 미국, 6월 일본을 방문했다. 평소 우리 외교를 ‘사대(事大)’라 비판했고, “남북관계만 잘되면 다 깽판 쳐도 된다”는 주장을 편 그의 ‘자주(自主) 외교’ 노선에 관심이 집중됐다.

그가 일본을 방문한 6월 6일에 대해 논란이 불거졌다. 하필 순국선열을 기리는 현충일에 가는가라는 비판론이 나왔다.

더구나 그날은 일본으로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날이었다. 유사시 자위대의 무력 사용을 합법화하는 ‘유사법제(有事法制)’, 즉 ‘전쟁대비법’이 의회에서 통과된 것이다. 알다시피 일본은 1945년 패전 이후 군대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날 법안 통과로 다시 군대를 보유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 ‘역사적인’ 날에 도착한 노 대통령은 거침없는 행보를 했다. 자신을 “전후(戰後)세대의 첫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밝힌 그는 한일 단골 이슈인 ‘과거사’문제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양국의 ‘미래’와 ‘동반자 관계’만을 강조했다.

일본인들은 환호했다. 일본 언론은 유사법제가 통과된 날, 노 대통령이 일왕(日王)과 세 차례나 만나 다정하게 술잔을 부딪치면서 “과거는 없고 미래만 있다”고 연설하는 광경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마치 한국 대통령이 일본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쳐졌다.

노 대통령은 왜 그날 방문했는가. 알아보니 우리측이 ‘6월 국빈 방문(state visit)’을 고집했고, 일본측이 “천황 일정상 6일 밖에는 안 된다”고 하자, 그냥 수락했다는 것이다.

3박4일 내내 노 대통령의 파격은 이어졌다. 공식석상에서 대통령으로서 받아야 할 의전(儀典)이나 격식도 과감히 생략하거나 무시했다. 경협(經協) 명목의 경제적 실리도 챙기지 않았다.

2003년 6월 6일 일본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일왕과 건배를 하며 우의를 다지고 있다. [중앙포토]
TV에 나와 일본 국민들과 대화하면서 가장 우호관계를 돈독히 해야 할 나라로 일본을 제일 먼저 꼽았고, 이어서 중국, 마지막으로 미국을 꼽았다.

그의 거침없는 모습이 내게는 위태위태하게 느껴졌다. 당시 일본과 미국은 밀월 관계인 반면 한국과 미국은 소원해져가는 상황. 이런 동북아 형세를 일본 지도층, 특히 우익(右翼)이 어떻게 이용할 지 불안했다. 그들은 한때 아시아 전역을 삼키고 세계 제패까지 부르짖던 이들 아닌가. 순진한 한국 대통령과 교활한 일본 정치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정식취재도 원천 봉쇄한 일본 대사관

내가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이 ‘Japan as No.1’이라 불리며 세계 경제를 휘어잡던 199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일본의 ‘대(對) 한국 정보활동’이 궁금했다. 과거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인들이 지금 우리를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주한 일본대사관에 정식 취재 요청을 했다. 그러나 대사관은 전혀 뜻밖의 태도를 보였다. 우선 사무실 출입부터 막았다. 허용된 장소는 1층 로비 옆 작은 밀실. 자료 요청은 100% 거부됐다. 문화원 홍보책자마저 “재고가 없다”며 거절당했다.
 
대사관 전 직원에게 나와 접촉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평소 자유로운 취재를 허용하던 이웃 미국대사관과는 180도 달랐다.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궁리 끝에 일본 대사관을 담당하는 우리 정보요원들을 찾아갔으나 이미 그들에게도 ‘함구령’이 내려져 있었다. “함 기자에게 정보를 주면 앞으로 거래하지 않겠답니다.”
 
일본인들은 철저한 정보인간들이었다. 당시 취재에 협조한 한국인 직원의 증언이 지금도 생생하다.

1980년대 초 마에다(前田) 주한 일본대사가 김포공항에서 일본 유력 정치인을 태우고 양화대교를 건널 때였다. 대사는 갑자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 대한 일화를 꺼냈다. 이노우에는 내무·외무대신을 지낸 거물임에도 1894년 직급을 3단계나 낮춰 조선 공사(국장급)로 부임했고 1년 뒤 시해사건이 발생했다.
그분이 양화진 나루터(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내려 서울로 들어가면서 한 일이, 줄곧 가마꾼 걸음 수를 센 겁니다. 부임 첫날 그는 가마꾼 보폭에다 걸음 수를 곱해 양화진에서 경복궁까지 거리를 산출해 냈는데 지금 실제거리와 거의 맞아요. 선배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일을 했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도대체….”

이 대화를 엿들은 한국인 직원은 “섬뜩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고 회고했다.

조슈번은 일본 우익의 본거지

구한말 양화진은 제물포(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수로(水路)의 관문이었다. 1895년 일본 군인들과 칼잡이 80여 명은 경복궁에 침입,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하고 불태워 버린 뒤 달아났다. 그들 대부분이 양화진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로 가 일본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이노우에가 기획하고, 후임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전 육군 중장)에 의해 실행됐다. 이들이 바로 일본 우익의 본거지인 조슈번(長州藩·현 야마구치현)출신이다.

공교롭게도 구한말 조선침탈 원흉 대부분이 조슈 인맥이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육군 원수·총리 역임) ▶1905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인정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가쓰라 다로(육군대신·총리) ▶1909년 초대 조선통감으로 한일합방을 총지휘하다 안중근에게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총리) ▶1909년 2대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사법·재무대신) ▶1910년 한일합방을 성사시킨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육군대신·총리) ▶1915년 2대 총독으로 부임해 무단통치를 강행한 하세가와 요시미치(육참총장·원수)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이들을 제자로 삼아 조선·만주 정복을 주장한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同亞共榮論)을 가르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 역시 조슈 사람이다.

일본 우익의 본고장이자 한국 침탈 주역들의 고향인 죠슈번(현 야마구치현).

이제는 대놓고 “독도는 일본땅” 망발
 
이런 사실 등을 놓고 볼 때, 2003년 6월 노 대통령의 방일 이후 일본 우익들이 향후 독도를 이슈화시킬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네들로서는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주간지 편집장을 맡고 있던 나는 베스트셀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 대통령의 방일로 일본 우익들이 오판할 것 같습니다. 가상소설 독도를 써주십시오.”

주제와 대강의 줄거리를 말해 주었다. 1주일 뒤 원고를 받았다.

‘미·일은 가깝고 한·미는 멀어진 21세기초 동북아 상황. 군사 대국화로 가는 일본은 한·미 관계가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보고 독도를 침공, 무력 점령한다. 미국은 모른 체 하고 국제사회도 잠자코 있었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나지만 일본 대사는 적반하장으로 그동안 독도를 ‘강점’한 것과 일본군 피해 등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다. 또한 2003년 제정된 유사법에 따라 한국내 자국민 보호 명목하에 자위대를 서울에 배치시키고 사실상 한반도 강점에 나선다….’(주간조선 2003. 6.26)

우려는 그로부터 불과 2년도 안돼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2005년 2월 23일, 주한일본 대사가 느닷없이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이름)는 일본 땅”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펄쩍 뛰고 온 국민이 들끓었다. 노 대통령도 흥분을 참지 못해 “외교전쟁 불사” 등 화끈하게 대응했다. 방한한 미 국무장관(콘돌리자 라이스)을 붙잡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 정부·의회·언론 등이모두 나서 독도 문제를 정면 거론하기 시작했다. 일본 항공기들이 공공연히 독도 상공을 비행하는가 하면, 전 세계 일본 외교관들이 가세했다.

이는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원래 일본은 독도에 관한 한 간혹 총리나 극우 정치인의 망언이 나오긴 하지만 정면 대응은 하지 않았다. 과거 한반도 침탈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고, 한국 뒤에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영토 분쟁은 사실 전쟁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이슈다. 때문에 역대 한국 정부도 굳이 떠들어 국제분쟁화 시킬 필요는 없다는 전략에 따라 ‘조용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정부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로부터 9년 뒤인 2014년 현재. 일본인들은 이제 누구나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학교에서는 “한국이 불법점령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일본은 더 이상 ‘고개 숙인 패전국’이 아니다. 군사 대국화로 성큼성큼 나가고 있다. 이 거친 행보를 총지휘하는 이가 바로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다. 그의 가계(家系)는 화려하다. 아버지가 외무대신, 외조부 2명이 총리, 고조부가 청일전쟁 당시 조선 땅에서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이들도 일본 우익의 산실인 조슈(현 야마구치·山口) 출신이다.

아베 총리는 작년 8월 기자들을 대동하고 19세기 침략적 대외정책을 주장한 그들의 ‘영웅’ 요시다 쇼인의 묘소를 공개적으로 참배했다. 아베는 과연 어떤 다짐을 했을까.

그들에게는 ‘서울에 남겨둔 꿈(漢城之殘夢)’이 있다. 게이오(慶應)대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 말처럼 “조선은 빼앗길 수 없고, 빼앗겨서도 안 되는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의 땅”이다. 그 꿈은 조슈 인맥을 통해 지금 아베 총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앞으로 한·일간 일촉즉발의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 과연 그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함영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jmedia21@naver.com

 

 





대사관은 마치 나를 스파이 대하듯 했다. 이후 어렵사리 취재를 했지만 이 경험은 대단히 유익했다. 일본인들의 실체, 그들이 곧 ‘정보인간(情報人間)’임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보안의식과 미시적(微視的) 두뇌 플레이는 참 대단했다.

시스템적으로 일본 대사관은 대(對)한국 정보수집의 최전선이다. 대사관 내 정치·경제·문화·영사 파트가 각자 독자적으로 정보경쟁을 벌인다. 여기에 상사 주재원·특파원·교수·유학생 등 민간인이 가세한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가 본국으로 넘어가면 외무성, 내각조사실, 자위대, 경찰청, 종합상사 정보망 등과 오케스트라를 이뤄 한국의 실상이 샅샅이 파헤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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