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출판사가 제작한 뒤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을 받는 '검정(檢定)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검정을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서 오류와 편향된 서술이 다수 발견되면서, 국정(國定) 전환 논의가 시작됐다. 국정 교과서는 정부가 집필진을 꾸려 교과서를 직접 제작하는 방식이다.
26일 교육부가 개최한 '한국사 교과서 발행 체제의 개선안 토론회'에서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 전환 방안을 놓고 찬반 의견이 맞섰다.
◇"집권세력 입맛대로" 대 "국론 분열"
국정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은 국정 교과서가 정권의 이해관계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한국사 교과서가 국정으로 바뀌면 집권세력의 정당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며 "국정 추진은 반역사적·비학문적·비교육적인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했다. 최병택 공주교대 교수는 "국정 교과서는 교육의 다양성을 해치고 여러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는 길을 제한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국정 교과서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정권이 교체되면 국정 교과서의 내용 또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6일 오후 경기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사 교과서 발행 체제 토론회’에 참가한 전교조 조합원 등이 한국사 국정화에 반대하는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윤동진 기자
반면 국정 교과서에 찬성하는 학자들은 "현행 검정 체제의 한국사 교과서엔 좌편향된 집필자의 사관이 강하게 반영돼 있어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홍후조 고려대 교수는 "집필자마다 저마다의 역사관을 담은 검정 교과서는 다양성이 아니라 편향된 관점의 역사관을 학생들에게 퍼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재범 경기대 교수도 "역사 연구와 교육은 분리돼야 한다"며 "한국사 교과서는 학자들의 견해를 충분히 반영한 통설을 담아 단일한 교과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찬성론자들은 "8명의 저자가 8종의 한국사 교과서를 발행하는 것보다는 8명의 저자가 서로 토론하며 공동 집필해 1종의 교과서를 발행하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이다.
◇유관순 열사 누락 논란
이날 토론회에선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절반(8종 가운데 4종)이 3·1 독립운동을 기술하면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내용을 빠뜨린 것이 특히 논란이 됐다.
홍후조 고려대 교수는 "역사를 전공한 집필자들이 유관순 열사를 모를 리가 없는데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일부러 뺐을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결국 집필자의 편향된 역사 인식을 교과서에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라는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있기에 기술하지 않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친일 전력의 박인덕이 해방 후 유관순을 발굴해 이화 출신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라며 "북한에선 당연히 유관순을 모르고 우리나라 교과서엔 1950년대에야 들어갔다는 것이 2009년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라고 주장했다.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면서 '유관순 열사 누락' 논란도 뜨거운 쟁점이 될 전망이다.
교육부는 한국사 교과서를 현행 검정 체제로 유지하되 제도 개선하는 방안, 국정으로 전환하는 방안, 아니면 검정 교과서와 국가 발행 교과서를 동시에 허용하는 방안 등을 놓고 논의 중이며, 이르면 10월 중 발행 체제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