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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06.2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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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한홍구
이 한홍구라는 자야말로 강정구-송두율을 찜쪄먹고 남을 교활하기짝이 없는 4류주사파이다!
 
김기백 기사입력 :  2008/12/06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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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사는 한국사회에서 조갑제.지만원.복거일.안병직.이영훈류의 4류도 못되는 사이비 보수우파진영의 명색이 논객.학자들과 가히 견원지간을 방불케하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극단적 대척점에서 대치하고 있는 소위 진보진영에서 상당한 명망과권위(?)를 공인받고 있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벌써 수년전에 한겨레21에 공개기고한 글로서  논문형식으로 된 한홍구의 글이 바로 요즘 한창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는 근.현대사에 대한 교과서 수정문제와 직결되어 있거니와 김일성과 박정희에 대한 한홍구의 글을 보면 그들 소위 진보좌파진영의 내로라하는 명색이 학자.논객이라는자들 또한 감히 소위 보수우파를 사칭,참칭하고 있는 자들과 그 뇌파구조자체가 실로 막상막하.난형난제라 할만큼 도저히 치유,구제불능일정도로 철두철미한 이중잦대를 가진 대단히 교활하면서도 치졸하기짝이 없는 외눈박이 사이비들이라는것을 그들 스스로가 극명하게 입증하고 있는것이다.

 김기협-한홍구와 프레시안에 우선 일곱가지만 묻는다! [새창보기] / 김기백


정작 큰문제는 좌.우를 막론하고  21세기에 들어선지도 10년이 다되어 가는 시점임에도 유독 이땅에서만 아직도 왜 이런류들의 극단적 외눈박이.사이비들로 인해 온국민은 물론, 장차에는 압록강이남 한반도 전체의 모든 민중과 후세들까지 서로를 도저히 융합할수없는 원수로 삼아야하는, 참으로 말도 안되는 어리석기짝이 없는 자중지란을 도대체 언제까지 되풀이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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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0주기에 되돌아보는 세기의 인간…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4년 7월8일은 이북의 김일성 주석의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훌쩍 흘렀건만, 우리 사회의 김일성에 대한 인식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어릴 때부터 김일성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고 배워왔는데, 이미 그가 세상을 뜬 지 10년이 지났건만 통일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니 그가 적어도 통일의 걸림돌은 아니었다는 점은 확인된 것일까?


공공연히 날뛰는 從北 프락치들,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프레시안 박인규대표, 너무 졸렬하지 않나요?
?
 
‘김일성 가짜설’이 고개 숙인 이유


△ 사진/ ap연합

1987년 6월항쟁 이후 여러 민족민주 운동단체들과 대학가에서는 한국 사회에 관한 이러저러한 교양강좌나 학교가 많이 개설됐다. 당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은 방송 프로그램도 없었기 때문에 현대사에 대한 욕구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모든 교양강좌나 민족민주 운동단체가 개설한 학교에는 현대사 강좌가 빠짐없이 들어가게 되었다. 나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업의 일환으로 청년학교를 개설하고 거기서 상근하게 되었는데, 현대사 강의 의뢰가 오면 ‘동업자’로서 의리 때문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여기저기 바쁘게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어디 가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박정희 얘기를 하든, 학생운동사를 강의하든, 해방 직후의 민중운동에 대해 얘기하든, 한국 군부의 형성사를 강의하든 상관없이- 첫 번째 나오는 질문은 신기하리만큼 일정했다.
 
 “김일성, 진짜예요, 가짜예요?” 1999년 미국에서 돌아와 처음 강단에 섰을 때만 해도 학생들은 모두 ‘가짜 김일성설’- <한겨레21> 381호의 역사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을 배우며, 그렇게 믿고 자란 세대였다. 그런데 2002년경부터 ‘가짜 김일성설’을 처음 들어본다는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올해에는 그 수가 절반이 넘는 것 같다. ‘김일성 가짜설’을 처음 들어보는 학생이 늘어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김일성 가짜설 같은 천박한 이야기를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일이 적어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구분단 세력 입장에서 볼 때 살아 있는 김일성에 비해 죽은 김일성은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황 히로히토(裕仁)가 죽었을 때 총리를 조문 사절로 보내는 것에는 아무 말이 없던 한국 사회는 1994년 7월8일 김일성의 죽음으로 ‘조문 파동’에 휩싸이고 말았다. 보름 정도 뒤면 김일성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있던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승계할 것이 이미 기정사실화된 지 오래인데, 김영삼이 정상회담을 계속 추진할 것이었다면 상주이기도 한 김정일을 만나 어떤 말로 첫인사를 하려 했을까?
 
 정상회담을 하려던 상대방이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떴는데, 당시 한국 정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비상사태에 당황하지 말고 밟아야 할 조치를 규정해놓은 프로그램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유고시에 취할 조치를 규정해놓은 이 프로그램이 혹시 실미도 부대를 운영하던 시절에 만들어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남쪽의 특수부대가 북쪽의 최고지도자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북쪽이 군사적 보복을 취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이었다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전군 비상경계령에 이어 조문 파동이 일자, 북의 태도는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조문 파동이 있고 한 2년쯤 지나서 내가 공부하고 있던 워싱턴대학에도 이북 사람들이 방문하여 공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핵 문제와 조-미 관계를 중심으로 제기된 질문에 능란한 화술로 여유만만하게 답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남북 정상회담 개최 여부에 대해 묻자 갑자기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딱 한마디 했다.
 
“우리 조선 옛말에 절대로 상종하지 못할 놈을 상갓집 앞에서 춤추는 놈이라 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은 김영삼이 물러나고 김대중이 새로이 대통령이 된 뒤에야 추진될 수 있었다. 김일성,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오죽하면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길이 없는 ‘가짜 김일성설’이 나왔겠는가? 갈라진 조국의 한쪽에선 그는 민족의 태양인 반면, 다른 한쪽에선 극악무도한 전범이었다.
 
한쪽에서는 그를 더 이상 떠받들 수 없을 만큼 떠받들었던 반면, 한쪽에서는 무슨 일만 있으면 화형식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김일성이란 이름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1930년대에 우리 민족은 분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때도 조선 사람임에도 김일성을 공비, 폭도로 매도하고 그를 토벌하러 다닌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갈린 것은 아니다.
 
그는 과연 ‘괴뢰’였는가


△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국경지대에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김일성 장군처럼 자라라” 하고 빌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쟁취하고자 했던 우리 겨레의 염원에 대해서 무한한 용기와 기대, 그리고 신념을 솟구쳐주는 원천이며 그 상징”이었다. 이런 평가가 사실이라면 그런 인물에게 ‘민족의 태양’이라는 호칭은 과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이북의 김일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북의 김일성을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표인 이명영이 진짜 김일성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1970년대에는 술 한잔 걸치고 어릴 때 인민군에게 배운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흥얼대던 사람들은 죄다 ‘막걸리반공법’에 걸려 감옥에 가야 했다. 심지어 무허가 판잣집을 때려 부수는 철거반원을 향해 “야, 이 김일성보다 나쁜 놈아”라고 외쳤던 아저씨도 반공법의 고무찬양죄- 지금은 국가보안법 속에 버티고 있고, 말 많은 국가보안법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잡아들인 조항도 바로 이 조항이다- 로 걸려들었다.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란 말이 어떻게 고무찬양이 되냐고? 김일성은 인류가 출현한 이후 가장 나쁜 놈이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을 감히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라 하였으니 그만큼 김일성을 치켜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몰상식한 논리는 물론 좋은 학교 나와서- 영문법에서 최상급과 비교급을 같이 쓰면 안 된다는 것은 제대로 배웠음에 틀림없다- 고시에 합격한 엘리트 검사들이 만들어냈다. 다행히 이 사람은 1970년 8월 대법원에서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과장된 표현을 쓴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북괴의 활동을 고무하는 등 그를 이롭게 하려는 범의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기는 하였지만 유치장, 구치소 구경하며 치도곤을 당해야 했다.
 
이북에서 “김일성보다 나쁜 놈아”라고 욕을 했다면 감옥에 가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남쪽에서도 정반대의 이유로 무사하지 못했다. 이런 일을 과거의 코미디라 치부하며 웃어버리는 것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김일성은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한 상태에 놓여 있던 1937년 보천보전투를 통해 혜성같이 나타났지만,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에서는 민족의 태양에서 괴뢰집단의 괴수로 전락했다. 괴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꼭두각시란 뜻이다. 제 민족을 가리키는 말 중에서 가장 고약한 괴뢰란 말을 남과 북은 서로에게 마구 써먹었다.
 
지금도 수구언론은 ‘국방백서’가 ‘북괴’를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것을 트집잡고 있다. 김일성을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로 모는 것은 해방 직후에 남쪽에서 정권을 잡은 친일파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정권이 1950년대 중반부터 주체를 앞세우고, 자주노선을 추구했음에도 ‘괴뢰’란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이 ‘꼭두각시’는 소련의 해체로 자신을 조종할 배후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혼자서 춤을 추는 ‘괴뢰’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괴뢰였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의 웃기는 폄하
 
김일성은 참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항일무장 투쟁 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아니, 모든 조선 사람의- 소중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항일무장 투쟁 시절 이래 김일성의 꿈은 조선민족 누구나가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었다. 쌀밥에 고깃국은 김일성에게는 사회주의 건설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살아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심장이 고동을 멈춘 직후부터 그를 어버이로 섬기던 이북 주민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일치될 수 없다. 아니, 남쪽 사회 내부에서도 김일성을 놓고 평가가 일치할 수 없다.
 
그가 항일무장 투쟁의 영웅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해도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데, 그는 분단과 전쟁을 거쳐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첨예한 남북 대결의 주역이었다. 이북의 역사가들은 항일영웅 김일성의 업적을 너무나 과대포장했기에, 이북 밖의 학자들은 김일성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이북 학자들에 비하면 그를 깎아내린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또 그 주된 원인을 설사 미국 탓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김일성은 이북의 경제난과 인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남쪽 사회 내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깎아내리는 일만큼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단 하룻밤이라도 한데서 새어본 적이 없는 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단 한번도 발품을 팔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 영하 40도가 되는 추위 속의 밀림 속에서 밤을 지샌 투사들을 모욕하게 할 수는 없다. 항일투사 김일성에 대한 폄하는 곧 1930년대 후반 이래의 우리의 항일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폄하가 된다.
 
김일성을 한국전쟁의 ‘전범’으로 규탄하는 일은 친일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탈출구였다. 그들에게 모든 역사는 1950년 6월25일에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이전에 우리가 왜 분단됐는지,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일제의 압제하에서 누가 일제의 앞잡이였고, 누가 항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전쟁이 찾아왔는지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군대를 동원한 자가 모두 뒤집어쓰는 그런 게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사상자들, 특히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이 누구 손에 죽었는가도 상관이 없었다. 김일성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민족의 태양에서 소련의 괴뢰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온 전범으로 추락해갔다.
 
분단된 조국에서 그가 계속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가 북쪽에 있는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형제들의 수령,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평양은, 아니 전 이북이 흐느꼈다. 물론 박정희가 죽었을 때도 착한 백성들은 연도에 나가 슬피 울었다. 그러나 그 강도가 똑같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 독재자들의 세뇌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거대한 가족국가의 가부장이었던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의사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


△ 김일성 주석이 10년 전 세상을 떠났을 때 전 이북이 흐느꼈다.



△ 남한 언론은 조문논쟁을 일으키며 남북관계를 냉전시대로 되돌려놓았다.

귀족영웅 아닌 자수성가형 민족영웅 김정일의 출생을 두고는 이북의 이데올로기들이 백두산에 샛별이 솟았다느니 하면서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을 늘어놓지만, 김일성의 출생은 그렇게 미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영웅이었지, 출생부터 신비스럽게 미화돼야 할 귀족영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제 동원이 극심해지던 때 사람들은 김일성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으로 가버렸고, 그의 활동을 공비의 살인·방화·약탈 만행으로 폄하하면서도 전해주었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두 신문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던 차에 해방이 되고 김일성이 나타났다. 그것은 죽은 줄 알았던 홍길동이나 홍경래, 또는 로빈 후드의 귀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어 그의 이름으로 땅을 나누어주고, 각종 조직을 만들어 주민들을 참여시켰다. 김일성이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처음 내린 정령은 연필 생산에 관한 것이었다.
 
배우지 못한 한을 품은 사람들을 김일성은 감동시킬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실시된 개혁을 통해 수백년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봐도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된 땅을 갖게 되었고, 인민위원회다 농민동맹이다 여성동맹이다 하는 각종 조직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 석자를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는 비록 이북의 역사가들이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일본군을 삼대 쓸 듯 물리치며 군사적 해방을 쟁취한 짜릿한 순간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세계사에서 이 수준의 혁명을 달성한 지도자는 몇 안 된다- 분명히 혁명의 창건자로서 위치를 누릴 수 있었다. 혁명의 창건자, 이는 스탈린이나 덩샤오핑도 넘볼 수 없는, 한 나라에서 오직 한명의 혁명가만이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 덩샤오핑과 만나는 모습.(사진/ ap연합)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였지만, 또한 민족주의자였다. 1920년대나 1930년대에 소련인이 아니라면,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소련의 권위는 소련이 잘해서 생겼다기보다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대의에 자발적으로 복종한 각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제기하자, 국제주의자를 표방하는 각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소련을 보위하는 것이 되었다.
 
민족주의자, 그리고 실용주의자
 
민족주의자의 아들로 태어나 만주 땅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김일성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과 갈등, 특히 조선인 항일투사가 최소 500명 이상 희생된 민생단 사건을 통해 남다른 민족주의를 체득할 수 있었다. 전후의 공산국가 지도자로서는 특이하게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감옥을 모두 체험한 김일성은 약소 공산국의 지도자 수업을 온몸으로 단단히 치렀다. 원래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부르주아지의 전유물로 보면서 비판해왔고, 이북도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민족주의에 대한 이북의 평가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전복’이라 부를 만큼 달라졌다. 종래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동일시하면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이북은 1999년에 간행된 조선대백과사전에서 민족주의는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상으로 긍정적으로 보았다. 민족주의에 대한 사전상의 정의의 변화는 김일성 자신이 민족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86년 김정일의 ‘조선민족제일주의론의’ 제기나 1990년대에 들어와 단군릉을 거대하게 지은 것도 다 민족주의자로서 김일성의 색깔이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아예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 앞에도 ‘진정한’이란 수식어를 붙였지만, 공산주의 앞에도 역시 ‘진정한’이란 수식어를 붙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국가 단위로 진행되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하에서 식민지 나라들에서의 진정한 민족주의와 진정한 공산주의 사이에는 사실상 깊은 심연도 차이도 없다. … 진정한 공산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이며 또 진정한 민족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라고 보는 것은 나의 변함없는 신조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공산주의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다.”


△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 상상도.

김일성은 1992년 자신의 80살 생일을 맞이하여 <세기와 더불어>라는 이름의 회고록을 펴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회고록은 1945년 항일투쟁 시기를 다루는 8권에서 중단됐다. 그는 책 제목과 관련하여 “20세기와 더불어 흘러온 나의 한생은 그대로 우리 조국과 민족이 걸어온 역사의 축도”라고 말했다.
 
이 회고록의 1권과 2권은 민족주의자라고 커밍아웃을 한 김일성이 자신의 선배이자, 자기 아버지의 친구이자 후배들이었던 민족주의자들에게 바치는 따뜻하며 가슴 에이는 헌사였다. <세기와 더불어>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김일성은 20세기의 인간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덩샤오핑은 쥐를 잘 잡는다면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떻냐는 흑묘백묘론을 설파하여 유명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이 그보다 25년 전에 밥만 잘 먹을 수 있으면 되었지 왼손으로 먹건 오른 손으로 먹건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작은 나라 이북에서 그의 말은 법이 되고 그의 경험은 철학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와 권력을 누렸고, 유례가 없는 권력승계를 이루었다. 나도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부자간의 권력승계가 탐탁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비난만 하다 보면, 정치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다는 상식을 깨고 20년가량 북을 다스린 사실을 잊게 된다.


△ 평양의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사진/ 연합)

레닌이나 호치민이 되기에는… 어버이 수령이라는 봉건적으로 보이는 권위로 무장한 그는 분명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유형의 지도자는 아니다. 대통령 씹는 것이 일상화된 남쪽의 시각으로는 장군님의 사진이 비 맞고 있다고 금방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이북 사람들이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북 사람들이 보기에 저기 멀리 있는 대통령은 잘근잘근 잘도 씹어대면서 사장님은 고사하고 부장님, 과장님 앞에만 가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하며 얌전히 <애모> 노래만 불러대는 우리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김일성, 그는 레닌이 되기에는 너무 오래 집권했고, 호치민이 되기에는 일가친척이 너무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역사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나중에 비록 왜곡됐을지언정, 그가 세운 나라에는 분명 동학농민군의 꿈과, 의병과 독립군의 꿈과, 항일 빨치산의 꿈이 담겨 있었다. 어린 누이가 빚에 팔려 첩살이 가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당 간부가 되고, 장군이 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그런 나라였다. 소수의 빨치산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 건국 반세기 이후에 한국전쟁 때보다 더 힘들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던 나라의 지도자 김일성. 10년이란 세월은 아직 형제들의 수령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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