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선거경제/복지미디어전쟁국제정치.경제민족/통일사회/사법군사/안보문화/스포츠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전체기사보기 교육/과학   고대사/근현대사   고향소식/해외동포   포토/해외토픽  
편집  2024.10.22 [19:20]
정치/선거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우리의 소원은 편히 사는 것
18대 총선은 민주주의의 꽃인가 낙엽인가
 
이한/칼럼니스트 기사입력 :  2008/05/12 [14:10]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밴드
18대 총선은 민주주의의 꽃인가 낙엽인가
 
18대 총선은 민주주의의 꽃인가 낙엽인가

 잔치는 끝났다. 대선도 총선도 ‘그들만의 축제’로 막을 내렸다. 개혁과 진보라는 지난 십년의 화두는 국민에게 무능과 독선으로 각인되어 돌팔매를 맞고 비참하게 자멸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잃었는가. 두 번의 선거가 남긴 족적(足跡) 속에 정답이 있다. 이 문제를 풀어보기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은, 오늘 우리들의 선택이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는 사실이다. 희망의 문고리를 잡은 것인지, 절망의 돌부리에 걸린 것인지, 징조는 있지만 예단하고 싶지 않다.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도덕성 부재의 허깨비놀음에도 불구하고 ‘∼면 어때? ~만 잘하면 그만이지!’라는 유행어를 믿고 국민은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 주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사독재의 후신이라는 둥 차떼기라는 둥 그토록 혐오해마지 않던 수구세력으로부터 참회의 반성문 한 장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기꺼이 면죄부를 던져주고 만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어설픈 진보 개혁파의 과오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과거 그들이 타도하려 했던 대상보다 더 비판받아 마땅하며, 결국 그들의 실패가 곧 백성들의 상실감으로 이어져 ‘개가 나와도 찍어 줄 것’이라는 로이터 통신의 비아냥까지 들었다.




 어찌 되었건, 국민과 참여 두 정권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응징의 뒷맛은 영 씁쓸하기만 하다. 따지고 보면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이성보다는 감정이 우선된 후진국형 선거다. ‘먹고사는 문제가 도덕성에 우선함’을 또 한번 확인시켜준 사례가 아니고 무엇이랴. 대부분의 언론과 논객들은 총선과 대선을 아울러 한나라당의 승리라고 부른다. 천만의 말씀이다. 관중 없는 동네 축구에서 공만 두 개 주웠을 뿐이다.




 이명박의 지지율을 보면 국민전체의 30%에 지나지 않고, 총선의 투표율로 감안하면 유권자의 30% 이상 지지받은 당선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이들에게 진정 대표성을 부여해도 좋은 것인가 뻔한 사실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은 이미 우리나라 정치인에게 ‘필요악(必要惡)’이라는 선고를 내린 지 오래다. 그렇다면 언제 어느 때 떠도는 표심들이 탄핵 때처럼, 이번 대선과 총선처럼, 노도(怒濤)가 되어 어디로 향할지 누가 아는가. 집권자가 국민을 기망(欺罔)해선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잃어버린 십년으로 회자되는 전 정권의 실패는, 햇볕정책의 불투명으로 인한 대한민국의 정체성 훼손과 과거에만 매달려 민생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데서 기인(基因)한다. 그러나 세상이 다 아는 이 사실을 과거의 열우당은 변명으로 일관했고, 반성할 줄 몰랐으며, 신 기득권 보호에만 집착한 나머지 국민으로 하여금 ‘썩어도 준치가 낫다’는 속담을 되새기게 한 결과, 한나라 당의 품에 수박을 넝쿨째 안겨주고 말았다. 현재의 여당은 이 교훈을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 구정권이 어떤 모습으로 괴멸(壞滅)되었는지를 직시하고 ‘울며 겨자 먹은 국민 선택’을 전폭적 지지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차기 대권을 쥐자마자 등장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모습은 점령군을 방불케 했다. ‘영어몰입 교육과, 의료보험 민영화와, 대운하’로 대변되는, 자칫하면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재앙이 될지도 모를 정책을 막무가내로 쏟아냈고 우려 섞인 충고를 태클걸기라 매도하면서 국민을 깔보았다.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은 현 시점에서 그네들 스스로가 그게 아니었음을 인정해 버린 것을 왜 그랬을까. 이러한 오버는 전 정권 실세들의 초기 작태와 다르지 않다. 만약 유인촌과 명계남, 유시민과 이재오, 이명박과 노무현의 언행이 그네들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라면 현 정권의 미래 또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으리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정권은 민의(民意)와 민생(民生)과 민권(民權)을 가벼이 여겼다. 민의에 반하는 정책을 밀어붙였고, 민생을 살피는 척했으며, 민권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 최후는 비참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문민정부가 그랬고, 국민의 정부가 그랬고, 참여 정부가 그랬다. 처음의 지지와 영광이 저항과 오욕으로 변했다. 5년 후 권좌를 떠날 때 현 정권의 뒷모습은 과연 어떨지 참으로 궁금하다. 부디 아름답기를 빈다. 그네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기도다. 여기서, 이미 지난 일이 되었지만 현재 진행형인 몇 가지 테마를 각 정당의 인물과 결부시켜 짚어보고자 한다.




―  호가호위(狐假虎威)

 어느 누가 그들이 낙선하리라 믿었겠는가. 당선만 되었으면 이재오는 이미 홍국영을 연상케 했을지도 모른다. 상상이 아니라 ‘좌시하지 않겠다.’던 일갈(一喝)을 통해 그 스스로 내재된 의식과 앞으로의 행동을 일러준 바다. 그러나 이슈를 선점한 문국현은 정확했고 재빨랐다. 총선 공약에서조차 빼버린 대운하는 부메랑이 되어 이재오에게로 돌아갔고, 자신감을 잃은 그는 제대로 된 방어기제(防禦機制) 하나 작동시키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자전거를 타고 대운하 장정에 나섰던 자신만만한 모습은 어느새 빛바랜 사진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보다 더 큰 패인은 교만(驕慢)과 아집(我執)이다. 그에게서 386의 특허품인 ‘내가 아니면 누가 있으랴’의 프레임이 곧잘 드러난다. 운동권 출신의 한계다. 이미 국민들은 ‘옳은 말을 해도 싸가지 없게 하던 전 정권 어느 장관’의 빳빳하게 풀 먹인 고개 높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이런 류의 오만이 국정 농단(國政壟斷)으로 이어짐도 수없이 지켜보았다. 어떤 경우든 고개 쳐든 정치인을 국민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항상 저 높은 곳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이재오는 이제 자전거가 아닌 걷기운동을 한번 해 보았으면 한다. 물길을 위해서가 아닌, 사람을 위해서, 가볼 곳 들을 것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 자신이 고난 받던 낮은 곳으로 내려가 처절한 삶의 형장(刑場)을 돌아보는 서민대장정(庶民大長征)을 떠나 보면 돌아오는 발걸음이 훨씬 더 가벼워지리라고 믿는다. 성공한 정치인들은 늘 그렇게 밑바닥부터 민초들과 함께 다시 일어섰고, 민초들과 유리(遊離)되지 않았다.




 이방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선거전에 돌입한 한참 후에까지도 그의 당선은 예측 1호였다. 현실적 여러 잣대로 그으면 이방호와 강기갑은 비교해 볼 그 무엇이라도 있었던가. 그가 낙선한 이유를 다른 것 놓아두고 이재오와의 공통점에서 찾는다면 호가호위(狐假虎威)와 오만(傲慢)에 있다. 그러니 지극히 서민적인 폼을 갖춘 강기갑과 대척점에 설 밖에 더 있는가. 서민들의 타켓이 될 이슈를 뒤집어 쓴 꼴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선 그 누구든 누구에게든 거들먹거리면 불신 받는다. 하물며 정치인과 백성 사이는 더 물을 필요도 없다. 농어촌의 척박한 삶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비쳤고, 사실여부를 떠나 언론을 통해 공천 전횡의 주범으로 찍혔으며, 특히 박사모도 소문처럼 낙선에 한몫 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쾌재를 불렀을지 모르지만, 박사모 건은 무슨 말로 호도해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도대체 남의 전쟁터에 왜 끼어들었는가. 전국적 조직을 갖춘 그들이 얼마나 어떻게 사천과 삼천포 거리를 누볐는지는 몰라도 박근혜의 전정에 장애 요인 하나를 제거하기 위한 ‘정지작업’과 ‘원한의 표출’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 또한 정치 그루피의 변종으로서 잘 생긴 얼굴은 결코 아니니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거울이나 쳐다보았으면 좋겠다. 기실 정치인에 올인하는 사람들은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의 선택은 과거의 노사모처럼 그들의 주군을 보호하지 못함을 명심해야 한다.




― 야습정치(夜襲政治)와 기대심리

 두 정도령의 대결은 마치 낭만파가 사라진 조폭 세계의 대결을 보는 듯 했다. 정치에도 바야흐로 횟칼 세대가 등장한 모양이다. 주먹과 주먹으로 정정당당하게 겨루던 그 호쾌한 결투 장면은 어디로 갔는가. 군사정권 시절에도 한밤중에 적장의 캠프를 야습하는 식의 공천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공천으로 예우한 사례도 많이 있었다. 최소한의 정치 도의다. 기본 룰조차 무시한 채 저지른 난해한 공천으로 밖은 놔두고라도 안에서부터 콩가루가 날리는 각 당의 모습이 바로 우리나라 정치의 현장에 있다.




 정몽준과 한나라당은 개인과 당의 계산이 따로 국밥이었지만 맛있게 이겼다. 하지만 꼴불견이다. 정몽준이 왜 이겼겠는가. 개인의 능력은 정치적으로 아직 검증된 바가 없고 단지 표면에 드러난 것만 보면, ‘월드컵의 환상과, 굴지의 재벌이라는 것과, 귀공자라는 것’과 그가 속한 당에서 그의 위상이 지역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으리라는 ‘유권자의 막연한 기대심리’가 어울렸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이곳을 한심하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는 공천 과정인데, 처음부터 정몽준이 동작구였다면 ‘꾀죄죄한 우리나라 정치판’을 감안해 한 페이지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순서가 정해진 경기에서 상대편 선수 명단을 보자마자 바꿔치기하다니!~. 다른 선진 민주국가 어디서 벤치마킹 해온 것인지 한번 알아본 후 배우고 싶다. 졸렬하다는 단어가 갑자기 글 속에 들어가는구나.




 또 하나 개운치 않은 것은, ‘국물파 유권자들의 개념 없음’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그러나 상당 부분 저울추를 정몽준으로 기울이는데 작용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뉴타운 사기 공방으로 분노의 목소리가 뜨거움이 이를 증명한다. 노회찬의 경우도 비슷한 코드를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서울에서 소득 수준이 가장 낮은 지역 중의 하나인 상계동이 현실적으로 필요했던 건 민생을 위해 지루하게 싸울 전사가 아니라, 당장 먹거리 장터라도 세워 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 상술이 더 어필했음이리라. 국회의원(國會議員)이 국해의원(國害議員)이 되지 않게 하려면 유권자들부터 지역 이기주의를 버려야 한다. 공약(公約)이든 공약(空約)이든 목을 맬 때는 우리 동네가 아닌 선진 민주국가의 미래와 결부시켰을 때나 한번 쯤 해 볼 일이다.




 다른 얘기지만, 정몽준과 여기자의 성희롱 공방을 다른 시각에서 진단해 보면, 이 사건은 몸에 밴 귀족의식의 발로이다. 그는 늘 높은 곳에 있었고, 단 한번도 서민과 애환을 함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만난 여기자는 그저 저 아래 있는 무지랭이 정도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러니 부자가 성냥팔이 소녀 다룬 듯한 손버릇이 무심코 나온 것일 뿐, 목적을 가진 성희롱은 아니라 사료된다. 진짜 문제는 해명 과정의 언행이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지 못했다. 구차한 변명! 이거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가 더 큰 꿈을 꾸고 있다면, 재래시장 할머니의 골 깊은 주름이 왜 생겼는지 사고의 전환과 체험을 통해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한편, 정동영은 축으로 몰렸다. 대선의 강진을 겪고, 이회창처럼 확실한 지역표의 기반도 없이, 참여 정부의 멍에가 코를 꿴 가운데, 느닷없이 옆구리에 기습 공격을 받았다. 정치력은 이런 틈새를 뚫고 나와 빛나야한다. 그러나 토네이도에 휘말려 그는 묘수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그와 손학규를 동일시해서 가늠해 볼 수 있다. 왜 한번 패한 적에게 또 졌을까. 그들은 당 대표였고 대선후보였다. 그렇다면 대선 직후 즉시 총선용 카드를 준비했어야 했다. 얼마나 좋은 기회를 놓쳤는지 돌아볼수록 딱하다. ‘대운하와, 영어몰입교육과, 의료보험 민영화’ 이 세 가지만 해도 이슈 몰이는 충분했다. 여기다, ‘강부자, 고소영’을 시의적절하게 합궁시켰으면 능히 야대여소를 낳았으리라. 눈에 보이는 정치적 목적을 뒤로 하고, 국가의 운명과 민족의 장래와 피부에 와 닿는 삶의 문제로 부각 시켜, 뭐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는 국민들께 삼천배(三千拜)를 올렸으면 분명 바람이 일었으리라.




 그러나 야당은 뒤늦게 구호만 내걸고 시늉만 했을 뿐 당의 명운을 건 총력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니 미풍으로 끝난 것이다. 전국을 누비며 끊임없이 뉴스를 생산하고, 대규모 군중집회도 열고, 천만인 서명 운동이라도 벌리면서, 촛불 행진을 하는 가운데, ‘그렇구나!~’하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었으면 상당한 저항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었는데도 물에 물 타 마시듯 소홀히 다루었다. 총선 후 세 정책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보라. 문국현은 승리했지 않은가. 이슈를 선점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태풍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권쟁탈전의 기원전 병법’이다.




― 정체성과 동류의식(同類意識)

 ‘사람에게 공천을 줘야지 새에게 주면 되나…’ 한나라당 인명진 윤리위원장이 구 여당에서 신 여당으로 날아 앉은 철새 정치인들의 공천을 두고 한 말이다. 옳다. 그러나 그의 말은 말로서 끝났다. 쫓겨난 사람들이 상당수 회생했고, 심지어 철새마저도 모두 굶어 죽지는 않았다. 인 위원장의 새타령을 개작해서 ‘텃새에게는 공천을 줘도 괜찮겠지요?’하고 불러본다. 최철국과 조경태! 이들의 당선은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조건 중의 하나는 ‘유권자와의 동류의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내몽고 사막의 황사처럼 불편하고 침침하다. 그러니 국민들에게 ‘언젠가는 창문을 열고 대청소해야 할텐데……’의 대상으로 찍혀 있을 수밖에 더 있는가.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주목할 만 하다. 서민 밀착형 정치를 해왔다는 점이다. 그들은 ‘내가 냅네!~’하는 티를 내지 않는다. 허리를 굽히고, 서민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뜻이 되겠다.




 무릇 표를 먹고 살길 원한다면 비록 그것이 쇼맨쉽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서민 친화적 정서’를 가져야한다. 그래야 가뭄이 들었는지 홍수가 났는지 표밭의 작황을 빨리 알아 대처할 것 아닌가. 보도에 의하면 최철국은 지역구의 모든 소외 시설을 가보지 않은 곳 없고, 귀 기울여 들었으며, 성심으로 뛰었다 한다. 그러면서도 언론이 선정한 베스트 의원 중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어찌 바닥표가 그에게로 몰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민심은 이렇게 어리석은 것 같아도 냉철하며 공평하다. 서민밀착형 정치! 최철국과 조경태는 평소부터 이를 게을리 하지 않은 덕에 사막에서 콩 싹을 두 개 틔운 것이지, 언론의 호들갑처럼 ‘노무현 효과’라는 말은 잘못 짚은 얘기다. 그 효과 속에는 부정도 긍정 못지않음을 유념해 보면 안다. 노무현 효과는 언론이 기사거리를 만들어 내려 노력한 끝에 생산된 단어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당선이 갖는 가장 중요한 상징성은 이미 다 알다시피 ‘지역주의 극복’이다. 이름보다 정당에 대한 선호도가 절대적인 곳에서, 그것도 그 지역에서 3선 시장을 지낸 한나라당 후보를 꺾었다는 것은 ‘장판파의 조자룡’을 연상케 한다. 지역 장벽이 난공불락의 성이 아님을 입증 시켜 주었고, 정당과 지역의 한계를 다같이 뛰어 넘었다는 사실은 이번 선거에서 그래도 위안 삼을 수 있는, 본인과 지역민 모두가 승리한 참된 쾌거다.




 승리의 다른 요인은 ‘투명한 정체성’에 있다. 그들은 적수공권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 앞에서 ‘통합민주당의 깃발’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았다. 비록 권력형 비리 인사였지만, 5공이 몰락했을 때 다른 인사들과는 달리 전두환의 곁에서 끝까지 죄과를 함께 짊어졌던 장세동, 당시 세간에 떠돌았던 그의 별명이 ‘의리의 돌쇠’다. 우리는 아직도 의리를 소중히 여기며 배신을 경멸한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이 더 유리하리라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둠속의 탄돌이’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고, 성공했다. 정체성은 정치인에게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텃새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가 왜 텃새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이번 선거의 중심에 박근혜라는 이름이 있었다. ‘저는 속았습니다…’로 시작되는 기자회견 은 태풍의 눈이었고, 봉숭아학당의 칠판이었다. 분명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누가 보아도 똘마니들을 모아서 일사불란하게 국정을 이끌어보겠다는 잔꾀가 드러난 공천이었으니까. 그 애끓는 모정(?) 때문에 ‘살아서 돌아오라’는 전송가도 생겼다. 그런데? ‘친박연대라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당명’은 또 무엇인가. 그네들 주군의 두 말씀에 담긴 함의(含意)를 길바닥에 쏟아버린 희명(戱名)아닌가. 그리고 모든 당이 오십 보 백보겠지만, 비례 대표의 면면은 정말 ‘눈 뜨고 못 볼 슬픈 개그’다. 묻는다, 양정례가 과연 국정을 논할 능력을 갖춘 인재인지를 증명해보라. 벌써부터 의혹의 눈초리가 비수로 변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박근혜에게 있어 박사모와 친박연대는 ‘안으로 불가원(不可遠), 밖으로 불가근(不可近)’해야 할 존재다. 아니면 계륵(鷄肋)이다.




 물론, 상황 논리를 심정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에겐 ‘뭘, 이름 하나 가지고 그래!~’ 할 수도 있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굳이 ‘친박연대라는 당명’을 쓰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을 ‘감성부조용(感性浮彫用)’으로 그리 한 것은 스스로 격을 떨어뜨린 행위다. 이제 우리나라 정치가 사람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서를 읽어보면 그렇고, 아직은 멀었다 해도, 국회의원 각자가 독립된 입법기관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가신이면 모르되, 국민의 대표라면 국민을 우롱한 것이다.

▲     © 편집자



  하여튼 그들의 상당수는 살아서 돌아왔는데, 갈 곳이 없다? 충고하노니 가지마시라. 지금은 때가 이르다. 기다려야 한다. 대저, 사람이 가서 쉴 곳은 오두막일지언정 상생의 집이지, 상극의 투우장이 아니다. 가만두어도 그대들의 주군은 관중석만 지키고 앉아 있어도, 싸워 줄 투우사와 소는 얼마든지 있다. 지금은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밭을 갈고 군량미나 쌓아 두는 것이 중원을 얻는 지름길이다. 현 추세대로라면, 언젠가는 이명박 정부가 궁지에 몰릴 공산이 크다. 벌써 자충수를 너무 많이 두었다. 미리 덤터기를 같이 쓸 필요가 없다.



 잠시, 고사 하나를 소개한다. 청 태종이 ‘송산전투’에서 명군을 대파했을 때 장수들은 신속한 북경 공략을 외쳤다. 그러나 귀순한 한족 ‘범문정’의 생각은 달랐다.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산해관’을 넘느니보다는 몇 년을 더 기다려 피 흘리지 않고 ‘산해관’을 넘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는 명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태종은 ‘범문정’의 말을 따랐다. 결국 부패한 명왕조는 이자성의 반란으로 얼마 후 사직을 청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청은 왜 더 빨리 자금성에 들어 갈 수 있었음에도 북경 입성을 서두르지 않았을까. 명의 백성도 곧 자신의 백성이 될 것이니 다치게 할 수 없다는 ‘애민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었고, ‘천시’를 알았으며, 북경에 들자마자 명조의 마지막 황제 ‘숭정’의 추모제를 올려줌으로서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청 왕조를 중국 역사상 가장 광대한 국가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각설하고, 아무튼 박근혜의 대중성은 경이적이다. 박정희의 후광을 감안해도 여러가지 면에서 돋보인다. 신중하고, 원칙을 중히 여기며, 대범하다. 작금의 정치인 중엔 그런 이가 흔치 않다. 김현철과 김홍업을 보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국정 운영은 어떨지 아직은 미지수다. 인간일진데, 어쩌면 그녀도 요즘 무척 고독할 것이다. 정치의 말림 속에서 길라잡이를 잃었음인가, 더불어 잔 기울일 벗님 하나 없어서인가. 다시 한번 ‘명청흥망기의 고사’를 새겨 보길 권한다.




― 우리의 소원은 편히 사는 것

‘창당, 탈당, 분당, 재창당, 합당…’을 불과 일 년 안에 해 치우는 괴력(怪力)으로, 이념과 정책이 극과 극인 세 정당도 한꺼번에 녹여 합금할 수 있는 연금술(鍊金術)로, 오늘의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둘 다 존재 가치가 높지 않은 정당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니까, 함께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거듭나길 호소하며 몇 마디 사족을 붙인다.



 통합민주당의 문제점은 정체성 혼란과, 지역적 한계와, 구심점의 상실이다. 이를 극복할 열쇠가 앞으로 다가올 전당대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지도부에 앉느냐 하는데 달려 있다. 사람이나 색깔이나 예전의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길 빈다. 동물적 영토 표시에만 골몰해 과거를 답습할 인사는 반드시 배제해야 한다. 12척의 배로 마지막 해전에 나선 이순신 장군처럼, 왜군이 아닌 서민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가, 삼민(민생, 민의, 민권)을 위해 전원이 옥쇄할 각오가 되어있다면 길이 열릴 것이다.




  한나라당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들이 승리한 전투는 없었는데도 전리품을 들고 희희낙락하는 꼴이라니. 이번 총선에서의 승자는 뒤로 물러 선 54%의 국민이다. 모든 정당이 다 패배한 선거다. 중요한 국가 정책은 임기를 의식하지 않아야하며, 미래 지향적이어야 하고, 창의적 비전 하에 추진되어야한다. 그러나 ‘혁신도시의 경우’처럼 또 한번 ‘과거부정식 칼 휘두르기’를 보았고, ‘한반도 대운하’처럼 ‘대장간의 풀무질로 우주선을 띄우려는 돈키호테식 추진’에 아연했다. 




 이 어찌 걱정스럽지 않으랴. 지난 10년만으로도 국민들은 진이 빠진 가운데 노심초사 지켜보고 있다. 제발, 백년 정당 한나라당, 존경받는 이명박 대통령이 되기를 기원한다. 그래야 우리도 좀 편안해 질 테니까. 선거는 민주의의 꽃이지만, 결과에 따라, 낙엽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이명박 정부에게 작금의 ‘광우병 파동’은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地天下秋)’가 아니어야 한다. ―끝― (이한/칼럼니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족신문
 
 
주간베스트
  개인정보취급방침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Copyright ⓒ 2007 인터넷 민족신문. All rights reserved.
Contact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