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4만 명 포로 잡아 ‘오랑캐 쳐부순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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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고지 전투는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군의 전적지이기도 하다. 6000여 명이 참전한 에티오피아군은 250여 차례 전투를 치르는 동안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포로가 없었다. 황실 근위대로 조직된 이 부대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투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살아 돌아간 아프리카 노병들이 가난한 조국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문득 궁금하다.
승리전망대에 서면 먼 시야로 이북 땅이 아주 깊다. 북한 금성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흐른다. 남대천은 한탄강을 거쳐 임진강으로 흘러간다. 그 개울을 건너 금강산전기철도가 지났다. 눈 앞 비무장지대(dmz)에 남녘 마지막 역사인 광삼역이 있었다고 한다. 역도 마을도 무성한 풀숲에 묻혀 흔적이 없다. 멀리 개활지로 북녘 하소리협동농장이 보인다. 그곳에 아침리역이 있었다. 서울에서 첫차를 타면 그곳에서 아침을 먹고 하루 코스의 내금강 관광이 가능했다고 한다.
대성산 자락 수피령을 넘어 다목리로 향한다. 20년 전 나는 이 길을 넘어 포병이 되었다. 그 길이 20년 전과 다름없다는 게 놀랍다. 군사지역은 어느 시기에 묶인 듯 시간이 더디다. 분단의 한시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변화는 있다. 다목리는 전보다 퇴락한 기운마저 감돈다. 술집과 다방, 여관이 있고 휴가병들과 면회객들로 북적이던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다목리터미널을 운영하는 최정화(78) 할아버지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라고 한다. 위수지역이 넓어져서 면회 장병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타고 화천 읍내로 나간다. 비단 다목리의 경우만이 아니다. 군부대를 낀 작은 마을들은 모두 이 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
최 할아버지는 15사단 주임상사로 지내다가 전역한 후 다목리에서 40년째 살고 있다. 터미널 창 밖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pc방을 바라보며 “요즘 군인들이 많이 다르지요?” 하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의외다.
“더러 그런 질문을 받는데, 나도 한때 몸이나 국가관이나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이런 아이들이 어떻게 나라를 지키나 걱정했지.”
분단은 파로호 주변 주민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평화의 댐 건설 전 주민들의 생업은 어업이었다. 하지만 댐 건설로 수질이 나빠져 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자 주민들은 대부분 민박을 운영해 생활을 해결한다. | |
“비상이 내리지도 않았지. 그런데 다들 부대로 복귀하는 거야. 그걸 보면서 아, 애들도 나름대로 군인정신이 있구나 생각했지. 그 뒤로 생각을 바꿨어. 요새 장병들도 마찬가지지.”
봉오리 얼음골에서는 반가운 가게를 만났다. 필승상회. 민통선 인근 외딴 이 가게는 내게도 추억이 서린 곳이다. 새 계급장을 달 때 그 집에서 박음질을 했다. 휴가 다녀오는 길에는 부대원들과 나눠 먹을 간식거리를 샀다. 주인 최대봉(54)씨가 새집을 짓고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산다. 세 아이를 키워서 내보내고 사슴을 키운다. 군인들을 상대로 30년을 살아온 그 역시도 군대생활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대처로 나가 살 용기가 없다고 한다. 그에게서 옛 선임하사들의 안부를 듣는다. 더러 잘 풀렸고 더러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부대에서도 인터넷 구매가 가능해져서 장사가 예전 같지 않다. 예전에 이틀에 한 번 들어오던 과자 차도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온다. 요즘 군인들은 주관이 강하다.”
다목리 인근에는 인민군사령부 막사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철원 노동당사가 전쟁 전 북한의 행정기관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라면 1945년 건립된 이 인민군사령부는 그 시절 군사시설을 체험할 수 있는 건물이다. 이곳은 화천과 철원 일대 군부대를 관할했다. 38선 이북 지역이었던 화천은 1951년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시작된 곳이다. 51년 4월,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내주고 다시 찾는 공방 끝에 전선이 38선 부근에 형성되었다. 중공군은 본토로부터 6개 군을 보충받아 총병력 70만 명을 전개시켰다. 그해 4월 중공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 첫 전투는 광덕산 전방에서 벌어졌다. 국군 6사단은 김화를 확보하고 중공군을 막기 위해 사창리 일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 그러나 6사단은 양평 용문산지구로 후퇴해 중공군과 접전을 벌였다. 용문산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은 3개 사단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강원도 화천은 용문산지구 전투, 파로호 전투 등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한 전투가 많이 벌어진 곳이다. 전쟁은 상처와 흔적을 남긴다. 사진은 상서면 다목리에 있는 인민군사령부 막사 건물이다. 화천은 전쟁 전 38선 이북 지역이었다. 인민군사령부 건물은 사용 목적에 걸맞게 단순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다. 일자형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있는 화강암 건물이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누런 돌들은 전쟁의 무상함을 웅변하는 듯하다. | |
해산을 넘어 파로호 비수구미 마을로 들기 위해 선착장에 섰으나 10㎝ 두께의 유빙이 뱃길을 막는다. 마침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수동리 김상준(58) 이장을 만나 그의 보트에 올랐다. 호수는 12월 말이면 얼어서 물길이 막힌다. 주민들은 겨우내 얼음 위로 다닌다. 호숫가 골짜기마다 한두 채씩 민가가 들어 있다. 호수 골짜기로 깊숙이 든 비수구미. 모두 네 가구가 산다.
“길이 나는 게 주민들의 숙원이지만 또 길이 나면 외지인들 발길로 이 터전이 망가질까 봐 걱정이다.”
평화의 댐 옆 비목공원의 기념 조형물. 6·25가 없었다면 공원이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 이 또한 전쟁의 흔적이다. | |
전성태·소설가
“전쟁 재발 막으려면 참상 잘 기억해 둬야”
가곡 ‘비목’ 작사가 한명희씨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도곡리 한씨의 자택을 찾았다. 몇 해 전 서울시립대 음대에서 정년퇴임한 한씨는 한문고전 강독, 전통음악 감상 등을 하는 문화단체 ‘이미시문화서원(www.imisi.or.kr)’을 이끌고 있다. 한씨는 초등학생 시절 충주 고향집에서 미처 피란가지 못한 채 인민군과 마주쳤다. 하지만 끔찍한 전쟁 체험은 없었다. 자신보다 불과 몇 살 정도 많은 데다 다리를 다친 한 인민군 소년병은 비가 오자 한씨 집 마루에 주저앉아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었다고 한다.
한씨가 전쟁의 실상을 체감한 건 군 시절이었다. 화천은 격전지였던 터라 호박을 심기 위해 막사 주변 땅을 파면 해골이 나왔다고 한다. 땔감나무를 베다 보면 박혔던 파편이 튀어나오곤 했다. 충격적이었다.
한씨는 제대 후 tbc(동양방송) pd로 입사해 ‘가곡의 오솔길’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장일남씨의 채근에 못 이겨 비목 가사를 썼다. 돌무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가곡 작곡 운동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한씨는 한국전쟁에 대해 “인간이 불완전한 이상 전쟁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맹목적이기 때문에 전쟁은 반복된다”는 것이다. 한씨는 “그렇다면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 잘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한씨는 ‘비사곡(碑史谷·bimok story zone)’을 조성할 것을 제안했다. 일종의 추념문화단지를 만들자는 것이다. 비사곡 안에는 성전(聖殿)도 들이고 문화예술인 창작촌도 조성한다. 한씨는 이달 국군유해발굴단과 함께 화천 지역을 방문한다. 유해 발굴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비목의 현장을 직접 찾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이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