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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자랑으로 내세울 것은
보수는 맏이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비애도 많았고 기쁨도 많았다.
 
文香 기사입력 :  2008/06/1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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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보수가 자랑으로 내세울 것은
  글쓴이 文香 작성일 2008/06/06 21:55 조회 542 추천 18

보수는 맏이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비애도 많았고 기쁨도 많았다.

보수는 동생인 진보가 개척하고 통로를 확보하면-진창 같은 길이라도-

고속도로로 만들었으며 진보의 여름날 한 철을 마감한 썰렁한 백사장을 치우는

뒤치다꺼리도 도맡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보는 기억했지만 보수는 몰랐었다.

진보가 오래되어 기득권화되고 그것이 굳혀짐에 따라 경색을 풀고 경화를 막는 것을

진보가 또 하는데 그래서 진보는 언제나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보수는 외로웠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었고 진보처럼 사람들의 칭송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자해를 해보기도 하고 애써 화장을 해보기도 했으나 그것은  곡마단의

어릿광대의 고단함이었고 늙은 창기의 화장처럼 서글픈 것이었다.

그렇다하더라도 보수는 한 소쿠리의 흙도 마다하지 않는 泰山이 되어야 하고 호수와

같이 모든 물들을 받아들여할 업장(業障)이 있었다.




보수는 성질상 억제하고 보전하는 특성이 있다. 이것은 진보의 전진하고 전개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것으로서 우리 사회의 일탈을 막아주고 중심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일정한 밴드로 묶기도 한다.

진보는 보수가 놓지는 것을 보고 알려지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나 보수는 이 세상에

드러난 가치들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그 사회적 책무인 것이다.

보수의 덕목은 온화함과 책임감이다. 보수가 온화함과 책임감을 잃으면 역사의

천덕꾸러기나 훼방꾼이 되는 것이다. 온화함이란 강자 아닌 강자의 넉넉함이자

승리자 아닌 승리자의 너그러움이다. 자신감의 표현이며 인품의 드러남이다.

패도(覇道)가 아니라 왕도(仁義政治)의 적통(嫡統)이자 정맥(正脈)인 것이다.

권위가 저절로 세워지고 설득과 호소가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것은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가혹한 말하기도 쑥스러운 오늘의 사회행태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책임감이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것으로 시류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정신이며. 난파선에서 승객들을 다 내보낼 때

까지 끝까지 배를 지키는 선장의 모습이고, 이 세상 중생 모다 성불할 때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이며,1.2차 세계대전에서 대부분 전사한

이튼스쿨의 학생들이자  조선과 함께 순장(殉葬)해야 한다는 충정공의 얼인 것이다.

보수는 중국이 이민족들을 동화시켰듯 모든 것들을 아우르고 가치를 재분배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맞불을 놓는다가나 맞대응한다는 말 등은 기휘 (忌諱)하는 것이며.

진보의 잘못을 눈감아 주기도 하고 진보의 실수를 이용하지 않는 「아녀자의 인」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보수는 언제나 채무자의 심정으로 국가경영에 임해야 하니

지금의 청와대처럼 정복자나 점령자연하는 지위가 아니라 늘 국가에 보은하겠다는

마음으로 국민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사(私)가 언제나 공(公)을 이기는 지금까지의 우리사회는 자못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다.

보수가 존경을 받으려면 지금까지의 아류(亞流)나 부류(部類)를 청산하고 이론(異論)

이설(異說)을 인정하며 사회적 문제들에 진보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보수의 두꺼운 가죽 때문에 창의력 있는 천재들이 죽고 어진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의 적은 노무현 전 정부나 북한 같은 특정한 대상에서 생명의 존엄성, 인간으로서의

가치 등을 위협하는 제반요소들로 전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나는 위에서 이렇게 보수를 해의(解義)했지만 우리나라에 보수는 없으며 단지 보수의

참칭만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유의 아들인 「평등」을 적대시하며 보수의 자양분이자 배양지인 「민족」을 북한 봉건왕조의 독점물이 되게 하였으며 「인민」이라는

좋은 말을 저들에게 빼앗겼으며 아직까지도 70년대식의 이분법적 잣대를 비대칭적으로 386과 함께 쓰고 있다. 탐욕과 방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이며 교양과 지성은 오히려 연대가 올라갈수록 더 찬란했었다.

공동체의 사표가 되지 못하고 비리와 음모의 축이자 발원지이다. 이념은 장식이고

실제는 친소(親疎)에 따라 가변적이다. 인성도 저급하며 이기주의이자 기복적이고

파당을 선호한다. 그래서 내가  모래성이고 오합의 무리라 하는 것이다.

인식의 범위를 스스로 제한하며 특정한 브랜드의 안경으로만 세상을 보려하니 역사가

손을 내밀고 절호의 기회가 와도 의심만하다가 일실한다.

공맹의 학을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바라봐야 하나 이들은 완강하고,

서구적 시각으로만 세계를 보니 이슬람과 아프리카의 고통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바로잡기나  인혁당 무죄판결은 보수층이 밑지고 당하고 끌려가는 게임이 아니라 역사와 화해하며 그동안의 멍에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마당인 것이다. 보수가 바로 서며 그 가치를 전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데도

자칭 「계산기」들은 이를 모르는 것이다.

신채호(申采浩)선생은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의 꿈이 김부식으로 인해 좌절되면서

아국(我國)의 꿈도 접어야했다고 했고, 오늘날의 정치학자들은 조광조나 김옥균의

좌절을 국운과 결부지어 애석함을 내비치지만 오늘날에도 국가나 보수에게도 기회는

오기도 하나 우매함과 자중지란으로 놓칠 수 있는 것이다.




정치란 것이 학문적으로는 고답적이고 현란하나 단적으로는 이해의 조절이자

샤만(shaman)의 기능임을 안다면 정치가 껄끄럽고 거북하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정치가 잡다한 여러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테크닉이라면 대승(大勝)이나 완승(完勝)

이나 전승(全勝)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신승(辛勝)을 좋아하고 석패(惜敗)에

안도하는 것이다. 51%의 지지가 중요하며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안 되고 상대방의

입지를 무너뜨려서도 아니 되고 명분을 만들어주고 애써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질서정연한 후퇴」에서 질서정연에 가치를 두고 「아름다운 양보」에서

아름다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이럴 때 정치는 선한 것이 되고 바른 것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고 소용에 닿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모르니 정치가 겉돌고 깽판으로 흐르고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되는 것이다.  훌륭한 정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품위를 가지게 하고 낭만에 젖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다음 샤만의 기능이다. 나는 어렸을 적 시골장터에서 이따금씩 산발(散髮)한

사람이 「여보시오 벗님네들, 이 내말 좀 들어 보소-」로 시작하는 하소연조의

사설(辭說)을 듣곤 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카타르시스(catharsis,

정화)이자 사회의 해원(解寃)임을 알게 되었다. 정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응어리를 풀어주며 오열(嗚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옛날 제정일치 시대의 샤만적

역할이 오늘날에는 더 증대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법령의 유무나 정책의

채택차이로 감옥에 가고 목숨을 잃는다면 억울하고 분한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이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자 씻김굿이 되어야 하며 정치인은 무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위에 떠도는 원귀(寃鬼)들의 숫자를 줄여서

하늘이 맑아지는 동시에 그 가족들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일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한 시대를 마감하며 정리하는 것도 되니 생각 있는 자, 결코 소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판단에서 저간의 인혁당 무죄판결사건과 관련하여

충분하지 않은 물증을 가지고 심증을 토대로 대법원판결이 내려지자마자 무슨

군사작전 하듯 8명의 목숨을 빼앗고 이를 참회하기는커녕 음모론적 시각으로 보는

그들에게서 「짐승의 성정」과 살기(殺氣)를 보았다. 나와 그들 보수들은 자리도 함께 할 수 없거니와 자연스럽게 나는 그들의 반대편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도 않거니와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역사적인 기회는 꼭 잡아야 하는 것이다. 꽃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아름다운 것이고 날랜 장군은 공을 세우기 위해 종군(從軍)을 주청할 수 있다.

기화(奇貨)와 편승(便乘)은 바람을 타고 물살을 타는 것이다. 세상에 千里馬도 먹는

것이 모자라면 둔마보다도 못하여 명마로서의 뽐냄도 없는 것이며 하늘이 차려준 밥상을 물리치는 것은 또 다른 재앙을 부르는 것이 된다.

조절에 능한 보수, 샤만을 아는 보수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까짓 소리(小利, 계산) 때문에 그따위 소절(小節, 극우보수) 때문에 역사가 주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땅의 보수들이 철옹성(鐵甕城)에서 나와 낮은 데(대중속)로 내려오기를 요구한다.

오늘의 잣대로 과거의 일을 재단하는 것은 비열한 것이지만 그러나 생명, 인권 등은

오늘뿐만 아니라 미래의 준거이기 때문에 충분히 거론이 가능하며 사죄와 유감의 표시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며 보수의 정신적 성장을 확인하며 용기가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보수는 자체의 중량으로 인해 내홍을 겪고 있다.

성장통이 될지 자멸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다른 당이나 후세의 사가들이  오늘의 보수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이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격하하고 비하해서 보게 해도 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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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얼리
좋은 내용 이군요.. 오랜만에 오신것 같습니다..
2008/06/08 15:45:04

김기백
文香/이 혼탁한 넷세계에서 참으로 보기드문 격조높은 글입니다! 민족신문의 방향과도 놀라우리만큼 일치하는 내용이라 지금당장 민족신문 대문톱으로 좀 옮겨갑니다~!

시간나시면 민족신문http://www.minjokcorea.co.kr/에도 놀러좀 오시기를~
2008/06/10 14:16:56

文香
쥬얼리님. 언제나 관심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기백님. 님의 글을 읽기도 했고 나라사랑 겨레사랑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우둔하나 균형있는 시각. 넓은 시야를 지향합니다. 민족신문을 조금전에 방문해 봤습니다. 심정적 지지자가 되겠습니다.소통을 한다는 것은 행운입니다.언제나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오.
2008/06/10 21: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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