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허리를 동여맸던 철조망이 사라지고 남북이 통일합의서에 서명하던 그날,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울렸다.
그러나 북한의 개방과 시장경제 체제 전환을 유도해 점진적인 통일을 모색해 왔던 한국은 갑작스러운 통일에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통일기금은 마련돼 있지 않았고 한국의 경제력은 북한을 흡수할 정도로 충분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국민 한 명이 짊어진 통일비용은 독일 통일 때 서독 국민 한 명이 감당해야 했던 것보다 3배나 많았다.
통일정부는 세금 인상과 재정지출 삭감을 통해 막대한 통일재원을 마련하는 데 나섰다. 통일된 지 5년여가 지나자 국가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재정은 파탄지경에 처했다. 경제성장률도 해마다 떨어졌다. 남북한 경제 격차를 줄이기 위해 막대한 예산이 북한의 산업시설에 투입됐지만 이미 세계 최대의 제조업 기지로 발돋움한 중국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북한 주민들조차 한국이나 중국산 제품을 선호했다. 북한 내 제조업 가동률이 현격하게 떨어지면서 실업률은 30%를 웃돌았다. 살인적인 실업률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북한 주민들은 남쪽으로 대거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북한 노동자들은 중국 동남아 등 외국인 노동자에 비해 숙련도가 낮았다. 당의 결정에 복종하고 의존하는 데 익숙해 있던 북한 근로자들은 한국 사회에 금세 적응하지도 못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수적 우세를 앞세운 북한 노동자들이 점령했고,크고 작은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공원이나 지하철역 등지에는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북한 주민들이 즐비했다. 반면 한국의 투기꾼들은 북한으로 대거 몰려가 땅투기에 열을 올렸다.
dmz 등 때묻지 않은 북한의 자연을 활용한 관광단지 개발 등의 프로젝트들이 줄을 잇자 달러와 위안화를 한 뭉치씩 들고 북으로 향했다. 한국전쟁 이전 부동산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도 줄을 이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북한 여성들은 술집 등을 전전했다. 서울 강남 유흥가에는 '북한 아가씨 대기 중'이라는 문구가 붙은 술집이 성업 중이었다.
통일 정부는 북한 이주민들을 위한 임대주택과 소형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주택단지가 들어설 지역 주민들이 정부청사로 몰려가 반대시위를 벌이는 사태가 속출했다. 술집에서 남북한 출신끼리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이는 사례도 빈번했다.
독일 통일 후 동서독 주민들이 서로를 '오씨(ossi · 게으른 동독놈)','베씨(wessi · 잘난 체 하는 서독놈)'로 비하해 부르던 모습이 그대로 재연됐다. 반세기 넘게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온 남북한 주민들은 서로를 이방인 취급했다. 영 · 호남보다 훨씬 지독하고 고약한 지역감정이 온나라를 뒤덮었다. 차라리 옛날이 나았다는 자조 섞인 푸념들도 일상화됐다. 통일 한국은 여전히 분단된 상태였다. 과거를 단절하지 못했고,그렇다고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
이 시나리오는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안 된 채 갑작스런 통일을 맞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경기개발연구원 등 국내외 기관의 통일 시나리오,소설 '국가의 사생활'(이응준 저) 등을 참고했으며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동용승 삼성경제연구소 경제안보팀장,유호열 고려대 교수,조동호 이화여대 교수,김근식 경남대 교수 등 대북 문제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작성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