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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여,시베리아의 억울함을풀어주오
일제강점기에 징집돼 해방 뒤 소련군에 잡혀 억류됐던 이들의 쓸쓸한 60주년
 
한겨레21 기사입력 :  2009/03/1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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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여, 시베리아의 억울함을 풀어주오 [2009.03.13 제751호]
[사람과 사회] 일제강점기에 징집돼 해방 뒤 소련군에 잡혀 억류됐던 이들의 쓸쓸한 60주년
이순혁 류우종
지난 3월2일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2층에서는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 자료전’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베리아 억류자’란, 일제 식민지 시절 강제로 징집돼 관동군(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 배속됐다가 해방 뒤 소련군에 붙잡혀 시베리아에서 수년 동안 억류됐던 이들을 뜻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전쟁터에 끌려갔고, 해방 뒤엔 소련군 포로로 3~4년 동안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조국에 돌아와서는 ‘빨갱이’라는 눈총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굴곡진 삶의 주인공들이다. 이렇듯 일본은 물론 승전국과 조국에서까지 삼중의 피해를 당한 이들은 ‘현대사 최악의 피해자’이지만, 6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들은 존재 자체도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20대 청년이 80대 중반이 되고 난 뒤에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이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편집자

» “그때 그곳에서 내가 말이지….” 지난 3월3일 오후 자택에서 만난 황희성 할아버지가 60여 년 전 포로 생활에 대해 입을 열었다.


 
서울 강북구 번동에서 부인(79)과 함께 살고 있는 황희성(84) 할아버지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이 고향이다.
 
 1925년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아가다 19살인 1944년 1월 징집됐다. 서울 용산에서 입대한 뒤 만주국 수도 신경 159부대와 일본 시모노세키 인근 모지항, 홋카이도 등을 거쳤고, 쿠릴열도 최북단인 파라무시르섬에서 해방을 맞았다. 일왕의 항복 선언은 35년 동안 일제에 핍박받아온 식민지 조선에 해방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황 할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불과했다.
 

“8월16일인지 17일인지 소련군이 상륙해 무장해제를 시키더구먼. 한 한 달쯤 이런저런 작업을 하다가 10월10일께 됐을까, 다 모여놓더니만 배에 타라는 것이여.
 
‘일본엔 칫솔이고 휴지고 하나도 없으니 최대한 가지고 나오라’고 하더만. 그래서 짐을 싸면서 ‘안 죽고 살았으니까 (일본을 거쳐 고향에) 가는가 보다’ 했지. 기름 수송선인데 입구가 집채만 하더라고. 꽉꽉 밀려가며 한 1천 명 정도가 탔을까, 배가 바다로 나서니까 (소련군) 사단장이 배 위에 올라서더니 ‘이 배는 동경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북쪽으로 간다’고 하더라고. 뭔 소린지, 왜 안 보내주냐고 항의도 하고 했지만, 별수 있나. 내려주는 데 내릴 수밖에. 거기가 알고 보니 (러시아 극동지방 아무르만에 위치한) 니콜라옙스크항이더라고.”

‘안 죽고 이제 돌아가나’ 했더니…




이번엔 기차를 탔다. 여전히 영문도 모른 채였다. 화물차 한 량마다 50명씩 태워졌고, 일주일쯤 대륙을 달렸다. 예전 독일군 포로들이 머물었다던 포로수용소에 내려졌다. 시베리아 한복판이라는 사실만 알 뿐, 어느 수용소인지 정확한 이름도 모른 채였다. 이튿날부터 벌목 작업에 동원됐다. 일본인·조선인 구분 없이 작업을 해야 했고 영하 40~50도를 넘나드는 추위에 시달렸다. 매일매일 작업량을 채워야만 ‘흘레바’(당시 소련의 주식인 검은 빵) 몇 조각이 주어졌는데, 상당수 포로들이 영양실조와 한파, 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우리 중에 전라도 남원 출신 김도상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지. 사범학교 교사를 하다 끌려온 사람인데, 이 친구가 머리가 좋아. 러시아 말을 한 단어씩, 한 단어씩 배우더니 통역관이 됐어. 작업도 면제가 되고. 그런데 하루는 상부에서 (항일혁명투사의 아들이었던) 강 중장이란 사람이 내려왔는데, 김도상이가 그 사람에게 러시아어로 ‘여기에 일본인 말고 조선인도 있다’고 말한 거야. 강 중장이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는지, 며칠 뒤 조선 사람만 다 모이라고 하더니 하바롭스크로 옮겨졌지. 시베리아에 온 지 1년쯤 됐을까 해서 벌어진 일이야.”
 
시베리아 한복판에서는 나왔지만, 여전히 포로 신분이었고 강제노동도 여전했다. 이번엔 주로 땅을 파고 파이프를 매설하는 상수도 공사에 동원됐다. 때에 따라서는 기차역에서 석탄·시멘트 하역 작업을 하거나, 밀 등 식량을 운반하기도 했다.
 
시베리아에서보다 일은 덜 고됐지만 굶주림은 마찬가지였다. 작업을 나갔다가 감자 서리를 하거나 운반하던 밀가루·설탕 등을 빼돌리다 적발돼 치도곤을 당하곤 했다. 주인 없는 들개를 잡아먹을 수 있었고, 소련군이 모질지 않아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은 점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그렇게 2년여를 보낸 1949년 1월, 황 할아버지는 2천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나홋카항에서 흥남행 배를 탈 수 있었다. 해방을 맞은 지 정확히 3년5개월 만의 일이었다.
» 3월2~15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2층에서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 자료전’이 열리고 있다. 억류자들의 당시 참상을 알리는 공식적인 자리가 마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8선 넘는 순간 쏟아지는 총알

“흥남에서 환영이 대단했지. 꽹과리 치고 장구 치고 환영파티를 해주더라고. 한 40일을 머물렀는데 동네 아낙들이 쌀밥에 김치, 동태찌개를 끓여줘 배불리 먹으며 지냈지. 그러다가 간도는 간도대로, 이북은 이북대로 다들 고향을 찾아갔지. 나처럼 고향이 이남인 사람은 철원까지 기차를 태워다주더구먼. 이튿날 열댓 명이 함께 38선을 넘는데 남한 군인들이 총을 쏘는 거야. 두 손을 번쩍 들었는데, 누구는 손바닥에, 누구는 배에 총알을 맞았어. 그런데 다행히 조금씩만 다쳤고 죽은 사람은 없었어.”
 
황 할아버지 일행은 포천경찰서에 인계됐고, 조사가 시작됐다. 경찰서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데 서장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북에서 간첩과 같이 온 사람 없냐”고 물었다. 이어 간단한 조사가 시작됐고 경찰서 바닥에서 쪼그리고 앉은 채 밤을 새웠다. 이튿날 버스가 와서 인천 송현동 수용소로 옮겨졌다. 비슷한 시기에 38선을 넘은 동료 500여 명과 함께 다시 수용소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일본군이 쓰던 창고를 개조한 수용소에 소련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에, 일제에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긴 자식이나 남편을 둔 사람들이 매일 찾아와 철조망을 사이로 수용자들을 살폈다. 남한 정부도 의혹의 눈길을 떼지 않았다.
 
<동아일보> 1949년 2월12일치 기사에는 이들을 보는 남한 당국의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들은 아직 조사를 받고 있는데 국제 정세가 미묘한 때이요, 또한 북한의 파괴분자들의 준동이 날로 심하여 가고 있는 때인 만큼 이들의 귀국에 실로 치안당국은 의아를 사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소련서 해방시킨 우리 청년 포로는 약 2천여 명이라는데 남한에 본적을 둔 자 500여 명을 분산 월남시키고 있다는 것도 이해키 어려운 사실로, 작금과 같은 파괴분자의 잠입이 빈번한 요즈음이라, 일층 조사당국은 긴장한 빛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략) 과연 그들 중에는 파괴분자가 있지 않을까 조사 결과는 매우 주목할 바 크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지만 별게 안 나오자 황 할아버지는 전북이 고향인 사람들과 함께 전북 경찰국으로 옮겨졌다. 당시 <동아일보>는 “소련에 포로로 잡혀갔던 청년들 그리운 고향으로-400여 명 오늘 일제히 분산”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고향으로 보내진 청년들의 수가 서울 18명, 경기 60명, 강원 37명, 충남 69명, 충북 33명, 전북 126명, 전남 46명, 경북 53명, 경남 19명, 제주 5명 등 모두 477명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황 할아버지는 전북 경찰국에서 가슴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판을 걸고 사진을 찍은 뒤 어디서 뭐하다 왔는지 등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일주일 뒤 전주경찰서로 옮겨진 뒤에도 4~5일 동안 조사가 이어졌고, 1949년 4월 중순께 지서 순사의 손에 이끌려 고향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 해방 전후 황희성 할아버지의 이동 경로

‘소련에서 온 빨갱이’란 딱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왔는데, 놀라줄 가족이 아무도 없더라고. 내가 군에 입대할 때 용산까지 따라오셨던 아버지는 배웅하고 집에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저 세상으로 가셨고, 어머니 또한 전해에 돌아가셔서 탈상 중이더라고. 함께 살던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둘째누나네와 작은아버지 가족들이 우리 땅을 나눠가지고 농사를 짓고 살고 있더라고. 그해 가을에 지금 집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먹고살 게 있어야지. 땅도 없는데 직장을 통 잡을 수가 없어. 먼 친척이 하던 방앗간에 찾아가 볏가마라도 나르게 해달라고 했더니, 소련에서 온 빨갱이라며 쫓아내더라고. 그뿐만이 아녀. 요시찰 갑종 인사로 등록돼 있어 10리 밖으로 나가려면 지서에 신고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경찰서에 들어가 강연 들어야 하고, 도대체 살 수가 없었어.”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만큼 피난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마을에서는 큰 분란이 없었다. 옆 마을에서는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을 우물에 빠뜨려 죽였고, 수복 뒤에는 거꾸로 당했던 사람들 가족들이 반대쪽 사람들을 때려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지만, 다행히도 황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에서는 불상사가 없었다. 하지만 황 할아버지는 또 다른 괴로움을 겪어야만 했다.
 
“동네 동창생들이 자꾸 군인으로 오라는 것이여. 다이아몬드 두 개짜리 계급장(중위)을 단 동창이 와서는 ‘몇 달만 고생하면 다이아몬드 하나 붙여준단다’라고 말하기에, ‘군대 가서 포로까지 돼 그 죽을 고생을 하고 왔는데 왜 또 가냐’고 했지. 그랬더니 이번엔 영장이 날아오는 것이여. 군에 입대하라고. 너무 귀찮아서, 괴롭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휴전이 되고 몇 년 있다가 처당숙이 살고 있던 강원도 철원으로 이사를 가버렸지. 거기서는 괴롭히는 사람이 없더구먼.”
 
아직 일사불란한 행정체계가 잡힌 시절이 아니었기에 그나마 철원에서는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생계 걱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연탄 장사였다. ‘리어카와 집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부부가 온몸에 검댕을 묻혀가며 부지런히 일했고, 바로 옆에 쌀가게도 냈다. 1남2녀 자녀들이 장성한 1979년에는 아들 직장을 따라 서울로 이사해 현재 살고 있는 서울 번동에 자리를 잡았다. 마찬가지로 연탄가게와 쌀가게를 운영했지만 형편은 입에 딱 풀칠할 정도였다. 그렇게 바삐 살아온 30~40년 동안 시베리아 시절 얘기는 금기 사항이었다.
» 황희성 할아버지가 1990년 한-소 국교 수립 뒤 소련대사관에서 받았다는 노동증명서와 노동기념 메달. 이로써 강제노동 한 사실은 확인됐지만, 그에 대한 보상·책임과 관련해서는 일본·소련·한국 정부 모두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변화는 1990년 소련과 국교가 맺어지며 시작됐다. 고르바초프가 한국을 찾았고, 소련이 본격적인 개혁·개방에 나선 것이다. 이듬해 시베리아에서 포로로 붙잡혀 강제노역을 했던 동료들이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었고, 이 소식을 들은 황 할아버지도 모임에 열심히 나갔다. 하지만 정부도 대사관들도 아무런 도움이나 답을 주지는 않았다. 소련대사관에서 노동증명서와 기념 메달을 보내온 것이 전부였다.
 

500명이던 동료들 이젠 20명 뿐

또다시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조국에 돌아온 지 60성상이 흐르는 사이 500명가량이던 동료는 20명 남짓만 남기고 모두 세상을 떴다. 거동이 불편해 집안에 주로 있는다는 황 할아버지는 “한 달 전에도 회원 1명이 저 세상으로 갔다”며 한숨을 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련과 일본은 서로 책임을 미루고, 우리나라 정부는 아예 관심이 없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사할린에서 살던 동포들에게도 이렇게 무관심하지 않았는데, 유독 우리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줘. 일본도 한국도 (우리가) 죽기만 기다리는 것이지. 허기사, 눈도 침침하고 다리도 불편한 나도 이제는 다 죽은 목숨이여.”


포로생활 증언

굼벵이 먹고 개 잡아먹고…

지옥 같은 시베리아 포로 생활 가운데서도 가장 힘든 것은 먹을거리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한 갖가지 방안이 동원됐다.

우선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벌목할 때는 잣이 의외의 식량이 됐다. 장정이 붙어서 한나절 내내 작업해야 한 그루를 잘라낼 정도로 큰 나무들이 빽빽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잣나무였던 것이다. 한 그루 넘어뜨릴 때마다 200여 개의 잣을 얻을 수 있었다. 나무가 넘어지면 일단 잣부터 따내고, (하나씩 까려면 너무 힘드니까) 모닥불에 넣어 잣을 터트려 까먹었다고 한다. 황희성 할아버지는 “잣 먹는 재미로 막 나무를 잘랐지. 그런데 다들 처음 한 사흘 동안은 똥이 안 나와 죽을 고생을 했어”라고 말했다.

먹을 것이 부족하기는 포로들을 감시하는 소련군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마른 나무를 쪼개 그 안에 있는 굼벵이 같은 흰 벌레들을 잡아 볶아먹었다고 한다. 조선인 포로들은 처음엔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고 도망쳤지만, 나중엔 똑같이 따라하게 됐다. 배가 고프니 별수가 없었던 것이다.

2년 넘게 머물렀던 하바롭스크 조선인 포로수용소에서는 보신탕이 영양식이었다. 황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어보자. “하루는 우연히 차에 치인 개를 발견해 끌고 왔어. 물 끓이고 털 뽑고 해서 개를 잡았지. 밭에서 하지감자를 훔쳐와 국을 끓였는데, 맛이 기가 막혀. 보초한테도 좀 줬더니 안 먹더라고. 그런데 부대에 돌아가서는 ‘조선인들은 개를 먹는다’고 얘기한 거야. 소련군들이 서로 우리 있는 수용소로 오겠다고…. 개 먹는 것이 그렇게 신기한지, 구경하겠다고 말이야. 그러더니 소련군들이 목에 꼬리표를 달지 않은 것은 주인이 없는 개라며 잡아다주기까지 하대. 나중엔 민간인들도 기르기 성가신 개를 끌고 와서 사라고 하는 거야. 돈이 없으니 부식을 조금 건네줬지. 그렇게 해서 개고기 참 많이도 먹었어.”

각종 서리도 일상사였다. 주민들 밭에 몰래 들어가 감자나 옥수수를 가져오거나, 하역하던 설탕이나 밀을 한 주먹씩 빼돌려 허기진 배를 채운 것이다. 좀더 대담한 서리도 있었다. 황 할아버지의 설명. “여름에는 풀이 자라니까 주민들이 할 일 없는 노인네한테 부탁해 양을 풀어놔. 그런데 우리가 하루는 열한 말짜리 큰 쌀자루에 강냉이랑 배추 이파리를 잔뜩 넣어 풀밭 한쪽에다 놨단 말이지. 그러면 양들이 좋다고 먹다가 한마리가 그리 쏙 들어가. 그러면 날름 가마니 입구를 묶어버려. 둘러메고 수용소로 돌아와서 아주 잘 끓여먹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조선인 포로들이 참 짓궂기도 했어.”

20대 중반의 피 끓는 청춘들인 만큼 포로들 일부가 현지 여성들과 맺어지는 일도 있었다. 주로 시베리아에서 벌목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황 할아버지는 “남자들이 독소전쟁에 나가서 다 죽었는지 후방에는 과부와 처녀들뿐이었다. 그 사람들도 하루 8시간씩 일을 해야 (배급이 나와) 먹고살 수 있었으니, 우리들과 같이 일을 하거나 접촉이 많았고, 그러다가 아이를 갖는 일도 일어났다”고 말했다. 소련 여성들이 ‘같이 사는 사람인데 석방해달라.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소련 당국에 내기도 했단다.












글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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