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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가솔직하고오자와가 호방하다고?
일왕-총리-간사장.. 백번의 립서비스보다 1965년의 한.일협정자체를 전면개정해야!
 
김기백 특별칼럼 기사입력 :  2009/12/20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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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여, 하토야마에게 너무 惑하지 마라!
反노무현하고 反김정일 한다고 다 보수우파일 수 있는
닭대가리들의 오두방정 삽질로는 결코 일본을 제압할수 없
한국의 주도하에 동북아 구도자체를 흔들어버릴

 
내가 늘 의아스럽다 못해 참으로 가소롭게 여겨마지 않는 일중의 하나가 바로 역대한국정부의 외교정책이거니와 ,그 중에서도 특히 역대한국 정권의 對日외교가 가장 가소롭기까지 한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 특히 근래들어서 일본의 정권교체 이후 한국에서 그나마 한다하는 언론매체에서 마저 입을 열거나 펜대를 끄적거렸다하면 일본민주당의 새총리인 하토야마의 놀라운(?)솔직성(?)에 감탄하는것 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얼마전 잠시 한국을 다녀간 일본 민주당정권의 막강한 실력자이자 간사장인 오자와에 대해서도  그역시 사나이다운 기질과 호방함(?)에 대해서 감탄과 찬사와 기대를 아끼지 않는 러브콜을 뛰어넘어 공공연히 참으로 얼빠진 짝사랑에 빠져있는 현상이라는것이다. 

 
 
미주알 고주알 긴소리를 늘어놓을것도 없이 한국 굴지의 매체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에게 묻거니와 그렇다면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릎꿇고 유대인 학살을 사죄한 독일의 빌리브란트나 정적들과 반대파의 격렬한 반대를 넘어선 암살위협까지 감내하면서 과감히 알제리독립을 허용했던 프랑스의 드골은 대체 어떤인물들로 평가되어야 하는 걸까? 라는 물음이다.
 



 

- 1965년의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자체를 전면 개정하지 않고서는 한.일양국의 과거사는 결코 명실상부하게 청산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한.일양국의 진정한 선린우호는 불가능!-
 
이글의 필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도대체 왜 ?한.일양국의 외교적 갈등이 밑도끝도 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할수 밖에 없는가?<<日人납치사건이 문제라면 명성황후 시해진상도 밝혀내야!>>하는 점과 1965년의 소위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의 가장 굴욕적이며 치명적인 독소조항은  바로 제2조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라는 문구는  1910년의 소위 한.일 합방조약이 체결당시부터 이미 명백한 불법과 강압에 의한 무효였다는 사실을 명확히 규정하지 아니하고 ,한.일양국정부가 각자 자국의 편의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할수 있도록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서 일본측은 얼마든지 " 체결당시에는 합법적이었고 따라서 유효한 조약"이었다고 해석할수 있도록 허용한 대목이야말로 <그 제2조로 인하여 나머지 조항은 더 이상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을만큼 조약의 근본정신및 취지가 완전히 왜곡된 굴욕적 불평등 조약이라는 사실때문에  당시의 야당과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전국적으로 격렬한 반대시위를 감행했던것이다>가장 근본적이며 치명적인 독소조항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지적 강조한바 있으며, 바로 제2조의 그러한 맹점때문에 소위 한.일 협정<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어 한.일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된지 이미 반세기가 다 되어가도록 한.일양국은 아직도 이른바 과거사문제를 둘러싸고 밑도끝도 없는 논란과 마찰과 갈등을 기약없이 반복하고 있게 된것이다.
 
 
-모든 국제조약과 올림픽기록은 깨지기 위해, 깨질때까지만 존재하는것!-
 
1965년의 이른바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은 매우 늦은감이 있으나  이제라도 반드시 전면개정되어야 할 매우 중차대한 필연적당위성은 1965년의 이른바 한.일협정은 그 당시만해도 임진강이남의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라는 유엔결의를 대전제로 한 한.일양국의 국교정상화조약이 었다는 점에서  남북한 정부가 유엔회원국으로 동시가입한지도 이미 오래되었을뿐만 아니라, 북한과미국 특히 북한과 일본간의 국교정상화<이른바 교차승인>문제가 꾸준히 공개교섭중인지도 이미 오래인 국제정세하에서는 그러한 사실 한가지 만으로도 1965년의 이른바 한.일 협정<한.일기본조약>은 마땅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전면개정되어야 하는 대단히 낡아빠진 누더기나 다름없는 시대착오적 국제조약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미.일은 본격적 갈등시대? 한.일은 여전히 굳건한 동맹도 부족해 밀월시대?-

하토야마 정권은 바로 직전 자민당 정권에서의 미.일합의도 깨자고 덤비는데 한국은 반세기전의 한.일기본조약을 신주단지 모시듯 떠 받들어야 할 이유가 대체 뭔가?? 라는 것이다.
 
뱀발: 이런글을 벌써 수삼년째 줄기차게 아니 신물이 나도록 쓰고는 있지만 내가 참 더럽고 아니꼬운것은 도대체 어째서 조갑제나 강정구는 말할것도 없고 하다 못해 지만원이나 허경영이 등등... 별 희한한 시러배 똥강아지만도 못한 잡것들한테도 추종자내지 동지도 있고 열렬한(?)후원자-지지자도 있는터에 도대체 어째서 뭐가 잘못되어서 유독 나한테는 단 한명의 그럴듯한 동지는 고사하고 지지자조차 없는가?? 하는 것이다. 쩝....

 
단기4342(서기2009)년 12월20일 새벽
 
인터넷 민족신문 발행인 :김기백
 
http://www.minjokc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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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독립 전쟁에 관하여

raifen
답변채택률 85%
2009.02.17 01:05
알제리 전쟁은 1954년부터 1962년에 걸쳐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알제리인의 독립 전쟁입니다.
 
 
1830년 이후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배하에 넣고 1848년에 3개의 직할지를 두었고 1881년에 동쪽에 이웃한 튀니지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확보했으며 1912년에는 서쪽에 이웃한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아 북아프리카 지배를 위한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피에 누아르(알제리 태생 프랑스인)와 동화하여 시민권이 부여된 유대인이나 일부 이슬람교도 외에 대부분의 선주민들은 차별과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1945년에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세계 각지로 퍼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반프랑스 저항 운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1954년 쥬네브 협정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독립하자 프랑스의 나머지 식민지도 독립을 원하게 됩니다.
 
1954년 알제리 민족 해방전선(fln)이 조직되어 무장 투쟁을 시작했고 프랑스는 이를 막기 위해 알제리에 병력을 증강하여 알제리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어 1955년에는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지에서 반프랑스 폭동이 발생합니다.
튀니지와 모로코는 1956년에 독립을 이루었으나 알제리의 경우에는 프랑스 내지화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방침이 확립되질 못했습니다.

게다가 fln 지지자로 간주된 현지 주민이나 촌락에 대한 프랑스군의 학살과 fln의 프랑스인이 경영하는 카페나 영화관 등을 노린 폭탄 테러로 인해 전쟁은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프랑스 본국의 여론도 fln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측과 프랑스 국익을 우선하는 측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1958년 알제리 현지 군인과 피에 누아르의 쿠데타가 발발하여 프랑스 본토 침공의 위협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프랑스 제4공화정 정부는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지 못해 결국 붕괴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샤를 드 골이 총리로 취임하여 제5공화정이 성립되었습니다.

알제리 전쟁으로 인한 재정악화가 지속되자 드 골은 9월에 알제리의 민족자결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1960년에는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차례로 승인했고 7월에는 알제리 평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알제리에서 싸우던 군인들과 피에 누아르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11월에 알제리에서 피에 누아르가 중심이 된 반 드 골 폭동이 일어났으나 프랑스 국민은 여전히 드 골을 지지했고 드 골의 식민지 독립 정책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현지 군인과 피에 누아르는 이를 반대하며 oas(비밀 군사 조직)를 결성해 반란을 일으켰고 알제리나 프랑스 본토에서 프랑스인 정치가나 경찰 관료 등을 살해하는 등 테러 활동을 벌였으며 1961년 9월에는 드 골 암살을 계획했다 실패하기도 합니다.
당시 oas에는 프랑스 최강 공수 부대 출신도 참여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은 공수 부대가 프랑스 본토를 기습하지 않을까 두려워 했습니다.
하지만 암살 계획이 발각되자 피에 누아르와 oas에 대한 지지는 급락했고 프랑스 본국에서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oas의 프랑스 군, fln, 알제리인에 대한 테러가 격화하던 중 드 골은 fln에 평화교섭을 요청했고 1962년 3월의 에비앙 협정으로 알제리 독립이 승인되어 프랑스 군과 fln의 전투는 종결되었으며 4월에 프랑스 본국에서 행해진 국민투표에서는 90% 이상이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습니다.
한편, oas는 fln에 대한 테러를 격화시켰고 이에 대해 fln도 보복 테러를 진행합니다.알제리는 테러로 인해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일반 피에 누아르들은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결국 oas도 패배를 인정하고 6월에 fln과 정전을 맺었으며 7월에 알제리에서 실시된 투표에서는 절대 다수로 독립이 채택되어 알제리의 독립이 결정됩니다.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으로는 fln의 창설자인 아흐메드 벤 벨라가 취임했으며 fln은 이후 알제리를 주도하는 정치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이후 장기 집권이 이어지며 알제리 국민의 불만은 높아지게 됩니다.
 
oas는 전쟁 후에도 프랑스 본토에서 드 골 암살과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결국 쇠퇴했습니다.
 
알제리에 남은 프랑스계 주민들은 이후로도 더 머물렀으며 프랑스 편에서 싸운 25만명의 알제리인들은 fln 등에 의한 보복으로 대부분이 살해당하거나 프랑스로 망명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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