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황장엽은 노동당 창건 65주년 되는 날에 세상을 떠났다. 적국으로 망명 온 (전향도 하지 않은) ‘주체사상의 창시자’의 죽음은 한반도 이북에 있는 권력집단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조선노동당은 황장엽과 함께 욕실에서 사망했고, 저 텔레비전 화면 속의 열병식의 주최자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체계화에 기여를 했지만, 조선노동당이 ‘맑스-레닌’을 벗어던지고 ‘김일성의 당’임을 선포하게 되는 시대 변화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황장엽의 망명은 북한 체제가 그들이 말하는 ‘우리식 공산주의’에서도 이탈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장례는 ‘통일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있고, 정부는 그를 대한민국을 위해 몸바쳐 싸운 이들이 묻혀 있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고 싶어 한다. 남한 망명 후 여생을 암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인간적 정리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황장엽이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공헌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수십 년의 생애를 대한민국을 절멸하려는 욕망을 가진 저 북쪽 ‘공화국’의 ‘리론가’로써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그가 망명 후 북 권력집단의 추악한 실체를 폭로한 ‘공로’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 것은 아니다.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이 만든 주체사상은 문제가 없는 아름다운 사상이었는데, 김일성이 이것을 개인적인 우상숭배에 활용하면서 북한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해왔다. 안기부는 황장엽이 망명한 직후 ‘황장엽의 주체사상’에 대해 설명하는 해설서까지 내주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황장엽에 대한 한국의 자칭 ‘보수 우파’들의 반응은 그들의 머릿속에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곧잘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이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 체제를 부정한다는 차원에서의 ‘자유민주주의’다. 그들은 대체로 ‘밥 먹이는 독재자’를 찬양의 대상으로 삼고, ‘밥 굶기는 독재자’를 경멸하려 든다. 이것이 그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황장엽이 북쪽에서 가지고 내려온 ‘주체사상’이 지도층에 대한 인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이념이란 것은 이들에게 큰 문제는 아니다. 이들에게 문제는 김정일이 밥을 굶기고 있다는 것이고, 밥을 굶기지 않으려면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민들이 사유재산을 늘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동하면서 북한 김정일 체제를 규탄하는 정부의 입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주체사상 이념의 정권”이 한국 사회의 ‘보수 우파’들의 바라는 사회상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들에게 반대하는 소위 민주화 세력,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사회는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 황장엽이 사망하던 날의 열병식과 함께 공식화된 북한 체제의 ‘3대 세습’ 문제는 이미 그 이전부터 남한 ‘진보 세력’의 화두가 되어 있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내정간섭이 부당하다는 민주노동당의 논평에 대한 경향신문 사설의 비판이 있었고, 이에 맞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국가보안법의 논리’로 사태를 재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몇몇 지식인들이 갑론을박했지만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프레시안에 실린 역사학자 김기협씨의 글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 현실에 맞는 ‘진보’를 추구했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노무현이 보수면 뭐 어떠냐?’라는 앞뒤가 안 맞는 질문으로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좌파’들을 질타했던 이 노무현 지지자는, 싱가포르 리콴유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습은 절대악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권력세습 문제를 우리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김기협의 주장은 좌파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김기협의 발언은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리콴유의 권력세습’으로 ‘인민을 굶기는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옹호할 수는 없다는 기본적인 오류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소위 ‘민주화 세력’이 한국 보수 우파들이 독재자를 변별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가 의문시 되는 것이다. 대체로 리콴유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박정희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박정희의 ‘위인전’을 완성한 월간조선 전 편집장 조갑제씨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리콴유와 박정희는 ‘지도자’를 좋아하는 아시아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위대한 지도자’들이다. 우익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이 ‘밥’이라면, 김기협에겐 무엇이 있는가?
차라리 김기협이 아예 박정희까지 긍정해 버린다면 그의 발언을 ‘소신있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되 그의 방식이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사회에선 통용될 수는 없고 이제 우리에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기협은 <뉴라이트 비판>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긍정 평가하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을 매섭게 쏘아붙인 사람이다. 뉴라이트를 비판한다고 박정희를 전면 부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김기협의 저술에서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는 구절을 찾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리콴유의 ‘세습’을 옹호하는 것은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옹호하는 것보다도 훨씬 독재자에게 친화적이다. 언론자유를 부정하고 도시의 청결함에 과잉집착하는 그의 통치행위는 전두환의 3s정책보다도 더 이전에,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박정희 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발전된 자본주의와 결합한 박정희식 ‘한국적 민주주의’의 체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적어도 한국 사회는 3s 시대를 넘어 문화산업 정책을 펼쳐낸 지난 ‘잃어버린 10년’ 동안 싱가포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생적인 대중문화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이 대중문화의 자본친화성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대중문화가 김기협이 그렇게 신봉하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김대중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적 특수성’을 주장한 리콴유에 맞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더랬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느 노무현 지지자의 리콴유 찬양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어떠한 지반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를만큼 몰역사적인 거다.
이 두 개의 반민주주의적 판타지의 실상을 들춰보니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주체사상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대립, 한반도의 1970년대를 남북으로 가르던 그 대립이 한반도 남부를 동과 서로 가르며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웃긴 것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이 ‘주사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믿는 그 집단인 것이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독재자의 딸’에 이를 벅벅가는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김기협의 논리는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논리가 아니고, 김대중·노무현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라도 박정희를, 리콴유를, 그리고 박근혜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김기협이 가지고 있는 1970년대의 환상은 우리가 말했던 ‘민주화’가 민주주의 이론을 제대로 체현한 것이 아니라, 독재자들의 ‘무능함’을 민주화 세력이 대체할 수 있다는 차원의 논리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리콴유를 규탄할 때라도, 김대중과 노무현을 예찬할 때 우리는 은연 중에 그런 관점을 가지고 그들을 과거의 독재자들과 비교한다. 그리고 두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들이 독재자들보다 ‘유능’했던 점은 역시 ‘시장자유’를 더 제대로 인정했다는 점에 있는 바, 우리의 민주화는 곧바로 ‘신자유주의’를 향해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김기협의 ‘오버’는 그가 속한 집단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지 못하지만, 어째서 민주화 세력의 지지자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외설적인 대상이다.
그리하여,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은 2007년엔 이명박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엔 다시금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명박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