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快男兒 몽양 여운형, 敵都 심장부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논파하는 獅子吼를 토하다!
폐회에 앞서 오스기의 선창으로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
 
민족신문 기사입력 :  2011/12/0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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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 지도층과 타협하러 오지 않았다. 자치권을 구걸하러 온 것은 더욱 아니다. 독립을 하겠다고 담판하러 왔다. 나는 유학생 여러분을 믿는다. 그대들의 협조를 바란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의 방일 회담과 동경연설

파워 boolingoo
2006.09.1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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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결성하고 좌우합작운동(左右合作運動)을 펼쳤던 정치인으로 유명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은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하고, 3.1 시위독립운동(三日示威獨立運動)의 직접적 계기가 된 2.8 동경 독립선언(二八獨東京立宣言)에 간접적으로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 가담하여 외국의 외교관들에게 일제 식민지 지배의 비합리성을 호소한 독립운동가였다.
 
3.1 운동은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들을 크게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강압적인 한국 병합에 대한 원한맺힌 반일 감정은 "대한독립만세!"라는 외침 소리로 활화산처럼 터졌다. 수많은 애국자들이 경찰서, 헌병대, 형무소 감방과 뜰 창고 속까지 꽉 메우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 위력은 공전절후(空前絶後)한 것이었다.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그치지 않았으며, 인심은 흉흉하여 소란하고 외국인의 이목은 현란했다. 일본의 악독한 폭압정치가 세계에 속속 알려지게 되자 일본 정부 당국자들은 크게 당황망조(唐慌罔措)하였다. 그들은 이 사태를 하루바삐 진정시켜서 자기들의 체면을 되찾고 통치력을 내외에 과시하려고 애를 썼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자치운동으로 유도하는 척하면서 묵살시키려고 획책했는데,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민족 지도자들을 회유하는 것이 제일 좋은 술책이라고 판단했다. 코가[古賀庚造] 척식국장관(拓殖局長官)은 이 문제에 관해 미즈노[水野鍊太浪] 신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무총감(政務總監)에게 누가 가장 적임자이겠는가 하고 넌지시 물었다. 미즈노 총감은 국내외를 훑어볼 때 상해에 있는 몽양밖에 적임자가 없다고 단정하고 여운형이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의 심중은 우연히 맞아 떨어져서 코가 장관은 마음놓고 일을 진행시켰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은 비록 임시정부에서 직책을 맡고 있지는 않았지만, 해외 독립운동 최초의 단체인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 사절단을 파견한 바 있고, 서양권의 정치인, 학자, 법조인, 외교관 등과 폭넓은 교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일본 군국주의 수뇌부가 상해에서 활동중인 많은 독립운동가 가운데 몽양을 선택하여 그를 초청해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조선 통치에 도움을 얻고자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1919년 8월경에 코가 장관은 미국 유학생 출신인 후루야[古屋] 일본 조합교회 목사를 시켜 상해 서양인 사회에서 활동범위가 넓은 조지 피치 YMCA 총무를 중간에 내세워 몽양과 접촉을 기도했지만, 몽양은 단연 거절하였다. 10월경에는 코가 장관의 사자(使者)인 기무라[木村淸次]가 상해에 와서 몽양을 만나 일본에 건너가 요로당국과 조선문제를 상의해볼 것을 간청했다. 몽양이 코가 장관의 책임있는 표시를 요구하자, 이번에는 장본인 코가 장관이 장문의 전보를 보내어 "조선 통치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겠으니 만나자."하고 신변의 안전과 기타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확언하였다.
 
한편, 야마자키[山崎] 상해 주재 일본 영사가 윌덴 프랑스 영사에게 몽양을 설득하도록 의뢰하였다. 윌덴 영사는 "일본 측이 신변안전의 책임을 지겠다고 했으니 동경(東京)에 가라."고 몽양에게 말했다.
 
몽양은 이에 안창호(安昌浩), 조동호(趙東祜), 이광수(李光洙) 등 동지들의 의견을 들은 후, 서모(徐某) 중국 상해신문 기자, 조지 피치 박사, 후지타[藏田] 일본청년회 총무 등과 상의하고 마침내 동경행을 결정하였다. 몽양은 이번 동경행 결정이 조선의 독립문제에 있어서나 자기 개인에 있어서나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일본 군국주의 수뇌부를 만나게 된다는 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세계여론의 환기에는 둘도 없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지와 신념, 자질과 실력에 대한 시험대라는 것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몽양이 동경행을 결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동휘(李東輝), 이회영(李會榮), 신규식(申圭植) 등은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 명백한 터에 몽양을 만나자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 뻔하다. 일본은 분명 우리에게 납득할 수 없는 조건으로 타협을 요구할 것이다." 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안창호(安昌浩), 윤현진(尹顯振), 선우혁(鮮于爀) 등은 찬성을 표시했다. 안창호는 여비 3백원까지 마련해 주었다.
 
동경행에 있어서 몽양은 신변안전, 언론과 행동의 자유, 통역은 장덕수(張德秀)가 맡을 것, 귀로는 조선경유라는 네 가지 조건을 내놓았으며, 일본 측에서는 이를 모두 수락했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 수뇌부가 얼마나 몽양과 접촉하고 싶어했는가를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다. 몽양은 최근우(崔謹愚), 신상완(申尙琓)을 대동하고 11월 중순에 뱃길로 동경행에 올랐다. 통역으로 지명한 장덕수와는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제 나 혼자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상대로 설전(舌戰)을 벌여야 한다. 나는 외쳐야 하고 답변해야 한다.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모든 행동은 고국 2천만 동포와 조국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나는 의젓하고 당당한 자세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우두머리들과 맞서야 한다.'
 
선상(船上)에 선 몽양의 끓는 투지는 푸른 바다에 결의의 불꽃을 연신 던졌다.
 
몽양은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자 하의도(荷衣島)에 연금되어 있던 장덕수를 만나 악수를 주고받으며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이때 와타세[渡瀨常吉] 일본 조합교회 목사와 유일선(柳一宣) 유일교회 목사가 다가와 자신들이 통역을 맡겠다고 나섰는데, 몽양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 두사람은 감시자처럼 계속 따라다녔다.
 
몽양의 방일(訪日)에 대해서는 일본 유학생 중에서도 찬반으로 갈라져 논란이 일어났다. 몽양은 1919년 11월 17일에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유학생 수백 명을 모아놓고 자신의 혼담(魂膽)을 털어놓았다.
 
"나는 일본 지도층과 타협하러 오지 않았다. 자치권을 구걸하러 온 것은 더욱 아니다. 독립을 하겠다고 담판하러 왔다. 나는 유학생 여러분을 믿는다. 그대들의 협조를 바란다."
 
유학생들은 오해가 해소되자 이봉수(李鳳洙)의 주선으로 여비도 조달하고 여론도 조사하였다. 어떤 학생은 적극 협력하겠다는 서약까지 하였다.
 
몽양은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측에서 제공해준 제국호텔에 숙소를 마련하고 여장을 풀었는데, 저녁에 미루야마[丸山鶴吉] 외무상(外務相)이 불쑥 찾아와서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본의 어느 신문에 여운형이 조선 자치권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는 왜곡된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대노한 몽양은 일본 정치 지도자들과 접견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일본의 외무성(外務省) 관계자들이 크게 당황하여 타협을 청하기에 몽양은 왜곡된 신문기사를 당장 취소할 것과 신문기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자신이 동경(東京)에 온 까닭을 설명할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였고, 일본 측에서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동경 유학생들을 동원하여 11월 27일 저녁 제국호텔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조선독립에 관해 연설을 한다.'는 계획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각국 특파원 및 신문사, 시사잡지사와 각계 저명인사를 초청했다.
 
몽양은 19일 오전에는 코가 장관을 만나고 오후에는 정부의 안내로 동경에 있는 각종 시설물과 명승 고적을 관람했다. 이것은 일본의 부강한 국력과 문화의 선진성을 과시해서 몽양의 심리적 변화를 노린 것이었다. 안내자는 특히 "24일에는 국빈이 아니면 구경할 수 없는 아카사카이궁[赤坂離宮]을 참관하게 될 것이다."라고 귀띔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20일 오전 9시 30분에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은 최근우(崔謹愚), 신상완(申尙琓), 장덕수(張德秀)와 더불어 두 대의 차량에 분승해서 코가[古賀庚造] 척식국장관(拓殖局長官)의 저택으로 향하였다. 코가 장관은 몽양을 동경에 초청하는데 가장 크게 힘썼던 인물로 몽양의 방일(訪日) 때에 그와 가장 많이 접촉한 사람이었다. 첫날의 회담에서는 가장 기본적이요 원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먼저 코가 장관이 입을 열었다.
 
"나는 조선의 우국지사들을 진심으로 동경한다. 그러나 가능하고 실효성 있는 활동을 해야 할 줄로 안다."
 
그는 계속해서 일본의 부강(富强)을 말하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조선인들이 일치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다음 사설을 늘어놓았다.
 
"나 개인은 한국 병합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미 병합이 된 이상 개인의 의사는 소멸되었다. 한국 병합은 회사합병과 같다. 한 회사가 실력이 부족하면 실력있는 회사에 합하는 것이 쌍방의 이익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궤변이었다.
 
몽양은 눈을 부릅뜨고 코가 장관의 발언에 대한 허구성을 통렬히 비판했다.
 
"한국 병합을 회사합병에 비유하는 것은 억지논리다. 한국 병합이 결코 우리 민족의 의사로 되 것이 아니요, 일본의 무력적(武力的) 위협 밑에서 소수 당국자 즉 열도 못되는 매국역적들의 소행이었지 당시 주권자의 진정한 의사가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병합이 양국 국민의 호의로 된 것이라고 말하나 조선 국민은 여기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다. 병합 직후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항쟁과 최근 3.1 운동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한국 병합은 강제적이요, 정치적, 경제적 불공평이요,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앙화요 수치다. 동양의 환란과 열강의 시기가 여기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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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한 다음 몽양은 계속해서 총독부의 악정을 낱낱이 실례를 들어 이야기하면서 일본의 소위 '선정(善政)', '덕정(德政)'의 가면을 벗겨 버린다. 일본이 자국의 이익에만 급급해서 주변국과 타민족을 무시 억압하는 태도를 맹자(孟子)의 고사(故事)에 나오는 "하필 이(利)를 말하는가? 또한 인의(仁義)가 있지 아니한가?"라는 명언을 인용하여 그 어불성설(語不成說)을 나무랐다.
 
한국 병합과 회사합병을 동일시하는 코가 장관의 궤변에 대해서 몽양은 다시 언급했다.
 
"회사합병으로 말하면 작은 것은 큰 것에 대해 반드시 손해를 입게 마련이다. 미국의 석유회사가 상업정책으로 무수한 작은 회사를 합병하여 치부하는 것이 그 실례다. 우리는 자손만대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동양평화를 위해 기필코 독립을 쟁취할 것이다. 만일 동양평화의 필요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조선독립을 가장 긴급한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몽양은 이처럼 전제한 다음 코가 장관이 되풀이해 말하는 실력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지었다.
 
"실력을 양성하는 데는 자유발전이 최대 요건이요, 최속 성공이다."
 
이어서 몽양은 항일(抗日)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당위성과 기본적 태도를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첫째로 우리 민족의 복리를 위해서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자주권으로 다스려졌고 자주권으로 발전하였다. 동양문화에 공헌이 많은 것도 자주성이 풍부한 까닭이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계승하고 현금의 발전을 도모하고 세계문화에 공헌하여 자자손손 행복을 영속하기 위해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로 일본의 신의(信義)를 위해서이다. 옛사람들은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어찌 곧 죽지 않더냐고 비판하지 않았는가? 역사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문화전파의 빛을 진 국가이다. 그런데 일본은 항상 병역(兵役)으로 회사(回謝)했다. 일청(日淸), 일로(日露) 두 전쟁을 조선독립을 위하여 한다고 말해놓고 조선을 병합했으니 이건 사기(詐欺)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천만 조선 민중은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고, 세계 각국은 일본의 신의없는 행동을 타매하고 시기하였다. 4억의 중국 민족은 일본을 원수(怨讎)로 알고 배척한다. 일본은 국토를 넓히는 것으로 기쁨을 삼으나 사실은 극히 위험한 지위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은 일본의 신의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장래 일본의 국리(國利)도 되는 것이다.
 
셋째로 동양평화를 위해서이다. 일본이 한국 병합의 형식을 지속한다면 두 민족이 다툴 것은 물론이며, 중국의 배일열(排日熱)은 결코 식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배일(排日)의 근인(近因)은 산동(山東)문제의 21개 조약이지만 원인(遠因)은 한국 병합에 있는 것이다.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독립을 승인하여 놓고 병합하여 자국의 새로운 영토로 삼은 것은 중국에 대한 사기(詐欺)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국 병합은 동양평화를 파괴한 것에 불과하다.
 
넷째는 세계평화를 위하고 세계문화에 공헌하기 위해서이다. 동양의 쟁투가 멎지 않는다면 필경 서력(西力)은 동(東)으로 올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자체의 평화는 세계대세의 균형을 보전하고 동양의 단결로 말미암아 세계문화에 공헌이 될 것이다. 오직 조선이 속히 독립된 뒤에라야 세계평화는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코가 장관은 몽양의 확고부동한 주장에 그의 말을 시인하면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이론을 내세워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다.
 
"일본의 한국 병합으로 인하여 세계가 일본에 대하여 시기가 생긴 것은 나도 안다. 나는 애초에 병합을 반대하였지만, 지금은 병합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이 일치협력하는 것이 유리하다. 자기 나라를 방어할 실력이 없는 조선 민족이 동양을 병합하려는 구미열강의 음모를 어떻게 막겠는가? 일한(日韓)의 합치가 평화의 근본이요, 실력이 없는 조선이 독립하면 동양평화에 해(害)가 아니겠는가?"
 
코가 장관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서양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하면서 조선독립은 오히려 동양평화에 위협이 될 뿐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방어력이 없는 조선의 독립을 방임하면 열대의 초목을 한대에 옮겨 심고 아무 보호도 하지 않은 것과 같지 않은가? 일본은 50년이 걸려 오늘의 번영과 군사력을 보유했는데 조선은 그만한 군사력을 감당할 만한 납세능력이 허락되는가? 영국이나 미국을 믿는가? 그들은 동양을 구미화하는데 혈안이 돼 있다. 따라서 자방력(自防力)이 없는 조선이 독립한다는 것은 동양평화를 파괴할 염려가 있지 않은가? 일본과 조선은 실력양성을 위하여 동력(同力)하기를 바랄 뿐이다."
 
침략을 얼버무리는 코가 장관의 실언(失言)에 대해 몽양은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은 공상이 되고, 이상이 없는 현실은 사물(死物)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실제적 세밀을 필요로 하는 것이요, 공상적 개괄(槪括)을 허용하지 않는다. 종래 일본인의 오해는 병합이 호의로 된 것이라는 점과 한인(韓人)은 동화가 가능하다는 것과 한인(韓人)은 선정(善政)에 열복(悅服)한다는 것이다. 오늘까지도 이 미몽에서 깨지 못하고 일한일체주의(日韓一體主義)니 동화주의(同化主義)니 하고 떠들고 있다. 이는 현실에 맞지 않는 공상이다. 세밀한 현실에 맞는 것을 논의하여 보자. 평화의 진수는 정신적 융화이다. 일체의 쟁투, 시기, 분동(忿動), 원한 등 불평을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 새 울고 꽃 피고 일난풍화적(日暖風和的), 활동적, 자연적 자유의 기상은 결코 사해(死海)의 평정(平靜)과 같은 것이 아니다. 평화는 생존의 희망, 희락, 자유, 평등, 존귀에 있다. 결코 위구(危懼), 절망, 압박, 차별 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쏘아붙인 몽양은 대내외적 동양평화에 대해 말한 다음 코가 장관을 꾸짖었다.
 
"자존심과 자주성이 풍부한 우리 민족으로서는 국가가 병합된 데 대한 원한이 크고 몸이 망국민(亡國民)이 된 데 비탄이 깊어 부끄러움을 참고 10년을 은인(隱忍)하다가 이제 거족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자존심과 자주성은 인격의 요소요, 진화의 근본이거늘 일본이 이것을 무력(武力)으로 진압하고 있으니 인류의 죄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중국에 대하여 야심과 탐욕과 권모술수로 침략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일본을 비난하고, 일본은 조선과 중국에 대해서 똑같이 동양평화를 파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원래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 없으면 하등 위협이 없다. 설혹 어떤 불행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가의 실력은 외타(外他)의 보호를 의뢰치 않고 자립하여 발전할 것이다. 열대의 초목을 한대에 옮겨 유리창 수증기 속에서 억지로 그 생명을 유지한다고 치자. 그것은 벌써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잃은 것이다. 자연 공기 속에서 우로(雨露)의 혜택을 받을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없으니, 차라리 한풍냉설(寒風冷雪) 속에 십사일생(十死一生)의 곤란을 받으며 사는 것이 타인의 보호를 받아 자기생존의 의의를 잃고 구차하게 기생적 생활을 하는 데 비하여 어느 것이 즐겁겠는가?"
 
그러자 코가 장관이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조선이 자유의 실력이 없이 독립이 승인되면 제3국의 침략이 있지 않을까? 일청(日淸), 일로(日露) 두 전쟁이 이것 때문이니 일본이 이런 희생을 반복하지 않겠는가?"
 
몽양은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이후 신사유람단 파견, 갑신정변(甲申政變),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경술병합(庚戌倂合)에 이르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일본이 국제간 약속을 어기고 신의 없음을 지적하고 병합의 부당성을 다시금 주장했다.
 
"현금의 세계정세로 보아 일본 외에는 중국이나 러시아나 독일이나 그 어떠한 나라도 조선을 침략하여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번 대전(大戰)의 교훈으로 더욱 그러하며 이제 시대가 변천하였으니 일본은 옛날의 악몽을 씻는 것이 좋을 것이며, 강권시대는 벌써 물건너 갔다. 이번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배패한 것은 군사적 실력 부족 때문이 아니다. 조선이 실력없이 독립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한갖 기우에 불과하며 전혀 근거없는 허위인 셈이다. 우리 겨레는 침략적 야심이 없는 민족이다.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세계평화의 선두에 서서 오직 문화로 세계에 웅비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기반(羈絆)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게 된다면 그 전망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밝다."
 
몽양과 코가 장관의 여러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몽양은 언제[나 공세요 통박인데 반해 코가 장관은 번번이 수세의 변에 골몰했다.
 
한번은 코가 장관이 이러한 제안을 해왔다.
 
"한국인들은 자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만일 당신이 자치운동을 한다면 필요한 자금은 얼마든지 대줄 수 있다. 그리하면 현재 투옥되어 있는 정치범은 모두 석방될 것이다."
 
몽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자유독립 이외에는 자치고 뭐고 아무것도 용납할 수 없다. 당신들이 정치범으로 체포, 투옥한 독립운동가들은 무조건, 그리고 당장 석방하라."
 
코가 장관은 다시 화제를 돌려 몽양을 회유했다.
 
"만주는 조선보다 몇 배나 크다. 당신이 활동하기에 알맞은 넓은 장소다. 만주의 척식(拓殖)사업을 맡아 해볼 생각은 없는가?"
 
그러나 몽양의 대답은 거절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사업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코가 장관은 몽양을 회유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회담 과정에서 몽양의 인품과 식견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몽양 일행을 위한 저택 연회는 순일본고전식으로 참으로 융숭한 것이었다. 작별에 임하여 그는 몽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의 의지에 나는 동의한다. 내가 만일 조선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대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총독부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내 계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대에게 가장 깊은 경의를 표한다."
 
일본의 육군상(陸軍相)인 다나카[田中義一] 대장은 신문지상과 코가 장관의 입을 통해서 여운형이 담대하고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여운형을 초청하였던 목적과는 달리 자칫하다가는 도리어 여운형에 의해 역선전(逆宣傳)될 것을 염려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수뇌부 가운데 손꼽히는 무단정치인인 그는 정의나 사리로 따져서는 이야기가 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비상수단을 쓰기로 했는데 그것은 위협적인 방법이었다.
 
조선주둔군(朝鮮駐屯軍) 총사령관 우쓰노미야[宇都宮] 대장을 비롯하여 관동(關東), 청도(靑島), 대만(臺灣) 등지의 군사령관과 미즈노[水野鍊太浪]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무총감(政務總監), 코가[古賀庚造] 척식국장관(拓殖局長官), 노다[野田貞休] 체신상(遞信相) 등 일본 정,군계의 거물들을 열석시켜 회의를 하는 자리에 몽양을 맞아들였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총본산, 힘과 권위의 우두머리들이 다 모인 셈이다. 여기에 피식민지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당시 34세의 젊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홀로 맞선 것이니, 장내를 일별한 그도 응분의 태세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다나카 대장은 첫마디부터 위협적인 언사를 토했다.
 
"우리 일본은 천하무적의 막강한 3백만 병력이 있다. 해군 함대는 사해(四海)를 휩쓸고 있다. 조선인들은 일전의 용기가 있는가? 만일 조선인들이 끝까지 반항한다면 2천만 정도의 조선인쯤이야 모두 죽여 없애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몽양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대번에 상대방의 위세(僞勢)를 꿰뚫어보고 흉중적수(胸中敵手)가 못된다고 판단했다. 다나카 대장의 허장성세(虛張聲勢)와 억지 음성이 부자연스럽고 생각한 몽양은 변설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천부적 소질을 발휘했다.
 
"그대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삼군지수(三軍之帥)는 가탈(可奪)이언만 필부지지(匹夫之志)는 불가탈(不可奪)이라는 말의 진의를 알 것이다. 일본의 군인들이 조선인 2천만명을 다 죽일 수도 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 여운형의 목을 일순에 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명의 혼까지 다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조선독립에 대한 나의 의지마저 벨 수는 더욱 없을 것이다. 하물며 나 여운형이 지닌 곧은 조국애의 일편단심과 독립정신까지 벨 수야 있겠는가?"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몽양의 첫마디에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다나카 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선은 자치를 하여 일본과 제휴하는 것이 제일 현명한 일이다. 조선이 일본과 제휴하면 부귀를 누릴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무자비한 탄압이 있을 뿐이다. 만세를 불러서 독립이 될 줄 아는가? 또 일본이 허락할 줄로 아는가?"
 
이른바 '다나카 플랜'이란 남북진출정책을 낱낱이 설명하면서 조선이 현재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 있는 것이 가장 적절한 현상이라고 주장하자 몽양은 분노를 억누르며 다나카 대장을 노려보았다. 몽양은 이런 분위기에서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해 보았자 당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리가 자리인만큼 솟구치는 울분과 조국애를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는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사건의 예를 들었다.
 
"호화롭기를 세계에 자랑하던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에서 물 위로 100분의 9밖에 안보이는 빙산덩이를 작다고 업수이 보고서는 물 속에 잠긴 10배 이상의 큰 덩이를 생각하지 않고 돌진하다가 빙산에 부딪쳐서 배 전체가 침몰되고 말았다. 그대들은 이와 같은 만용의 어리석음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선인이 부르짖는 '대한독립만세'는 물 위에 나온 소부분의 빙산이다. 모시(侮視)할 수 없는 것이다. 모시하면 세계인류의 정의에 부딪혀 일본은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다나카 대장이 발끈하여 내뱉듯 외쳤다.
 
"일본은 동양의 종주국이다. 일본이 망하면 동양 전체가 망한다!"
 
이에 몽양은 차분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조선의 속담이 초가삼간이 다 탄대도 빈대 죽는 것이 시원하다는 말이 있다. 동양이 다 망하여도 일본이 망하는 것을 통쾌히 생각하는 것이 우리 조선 민족의 솔직한 심정이다."
 
다나카 대장은 크게 불쾌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몽양은 오로지 천근같은 자세를 시종 견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나카 대장은 역시 여운형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서는 어떤 빈틈도 발견할 수 없었다. 화제가 중국문제로 넘어가자 몽양은 '다나카 플랜'의 남북진출정책을 논박하면서 다나카 대장에게 제의했다.
 
"일본은 남방의 손문(孫文)과 손잡는 것이 어떠한가?"
 
"우리 일본은 북방의 단기서(段琪瑞), 장작림(張作霖)과 협력한다."
 
"자라나는 남방의 손문과 손을 잡지 않고 무너져가는 북방의 수구파와 손을 잡는 것은 일본 대외정책의 큰 오류다."
 
그때 옆에 앉았던 청도주둔군(靑島駐屯軍) 사령관 유히다[由北中]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대가 자치운동을 원치 않거든 청도로 와서 일중(日中) 양국의 조화를 위해 일하여 주기 바란다."
 
"일본이 침략근성을 버리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이 간다 해도 중,일 양국의 조화란 바랄 수 없다."
 
몽양은 들을 가치조차 없다는 듯 가볍게 거절했다.
 
24일 오전, 몽양은 일본 측의 배려로 국빈이 아니면 외국인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곳이라는 아카사카이궁[赤坂離宮]을 구경하게 되었다. 일본인도 대신급이 아니면 참관할 수 없는 일본 황궁이었다. 일본 측은 이러한 곳을 국빈의 예우를 하는 의미에서 몽양에게 보여준 것이다. 물론 몽양에게 일본의 부강한 모습을 보여주어 독립운동을 포기하게 하려는 회유책의 일환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비원 안에서 오찬의 대접까지 받고 돌아나오는데 일본인 기자가 참관 소감을 묻자 몽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맹자(孟子)에 보면, 옛날에 주문왕(周文王)에게 70만리의 동산이 있었는데 꼴 베는 이가 들어가고 꿩 잡는 이가 들어가서 군왕이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니 백성이 동산이 작다고 하였고, 제선왕(齊宣王)이 40방리에 동산을 가졌는데 사슴 죽인 놈을 살인죄와 같이 벌하여 임금이 혼자 즐겨하니 백성들이 동산이 너무 크다고 하였다고 했다. 만일 일본에서 성군정치(聖君政治)가 있다면 이런 곳을 모든 백성에게 개방하여야 할 것이다."
 
즉 일본은 식민지 조선뿐만 아니라 자국의 국민에게도 선정(善政)을 펼치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오후에는 미즈노[水野鍊太浪]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무총감(政務總監)을 만났다. 그때 미즈노 총감은 일본 의회 예산회의에 참석차 동경에 와 있었다.
 
몽양은 미즈노 총감과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겸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경성역에서 강우규(姜宇奎) 동지의 폭탄이 터졌을 때, 그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가?"
 
상대를 역습하는 몽양의 담대한 기개였다. 미즈노 총감이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어디로 둘지 모르고 어색해하다가 한참 동안 어물거리더니 대뜸 물었다.
 
"그대는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는가?"
 
몽양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격했다.
 
"그대는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는가?"
 
몽양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하기가 용이하지 못할 것과 조선이 자주독립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이는 우주자연의 불변의 법칙이며 신이 명하는 민족의 권리라고 말했다. 미즈노 총감은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부인하고, 몽양은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설전(舌戰)에서 미즈노 총감은 거듭 수세에 몰리자 영어로 말을 바꾸는 것이었다. 몽양도 영어로 맞받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동양평화를 파괴할 조짐"이라고 주장하며 미즈노 총감의 궤변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노다[野田貞休] 체신상(遞信相)은 당시 일본 각료 중에서 영리하고 눈치가 빠르기로 유명하였다. 다나카 육군상과의 회담 대오 자리를 같이했던 까닭에 그는 몽양이 어떤 인물인가를 대강 알고 있었다. 그는 몽양 일행을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대가 하는 일은 다 쓸데없는 일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倂呑)한 것은 일본의 생존을 위한 길이었다. 조선을 내놓으면 일본은 죽는다. 일본의 생사(生死)가 달린 조선을 일본은 그대로 내놓을 수 없다. 그대가 주장하는 것은 다 망상이다. 그대의 연설이 훌륭한 웅변이요, 그대의 이론이 아무리 철저하여도 일본은 조선독립을 승인할 수 없다. 조선이 독립을 하려거든 실력으로 싸워라. 생명을 희생해서 국권을 찾아라. 거저는 안 준다."
 
이것은 오히려 한국 독립운동을 부추기는 발언이었다. 몽양은 즉석에서 돈지(頓智)의 웅변을 서슴없이 토했다.
 
"내가 동경에 와서 오늘까지 낙망했다. 아무것도 볼 만한 것이 없어서 허행(虛行)을 하게 됐다고 실망했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비로소 큰 인물을 하나 발견한 것이 내가 동경에 온 소득이다. 그대는 일본인 중에 가장 현명한 인물이다. 일본인 중에 오직 그대가 인간적이요 양심적인 거짓없는 참말을 하였다. 내 마음이 상쾌하다."
 
노다 체신상은 기가 막혀서 "도저히 그대의 변설(辯舌)에는 당해낼 수 없다. 내가 졌다."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동경을 중심으로 한 일본 유학생들의 정열적인 활동으로 11월 27일 저녁, 동경 제국호텔에 모인 5백여명의 세계 각국 특파원, 일본 유력언론의 기자 및 각계 각층 저명인사들 앞에서 조선독립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몽양의 사자후(獅子吼)가 시작되었다. 이 연설의 본론은 몽양이 한국어로 한 것을 장덕수가 일본어로 통역했고 마지막 외국 기자와의 문답에는 영어로 응답하였는데, 연설 도중 박수갈채가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 28일자 일본 각 신문에 경시청 특별 승락으로 연설 내용이 번역 보도되자 일본 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이 연설로 몽양은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 인물로 부상되었다.
 
연설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내가 이번에 동경에 온 목적은 일본 당국자와 그외 식자(識者)들을 만나 조선 독립운동의 진의를 말하고 일본 당국의 의견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금 각원(閣員)들과 식자 제군들과 간격없이 의견을 교환하게 된 것은 유쾌하고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는 독립운동이 평생의 사업이다. 구주전란(九州戰亂)이 일어났을 때 나와 우리 조선 민족이 독립국가로 대전(大戰)에 참가하지 못하고 동양 한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우두커니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이 심히 유감스러웠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장래가 신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시기가 반드시 오리라고 자신했다. 그러므로 나는 표연(飄然)히 고국을 떠나 상해에서 나그네로 있었다.
 
작년 11월에 대전(大戰)이 끝나고 상해의 각 사원에는 평화의 종소리가 울리었다. 우리는 신의 사명이 머리 위에 내린 듯하였다. 그리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동지 김규식(金奎植)을 파리에 보내고 3월 1일에는 내지(內地)에서 독립운동이 돌발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곧 대한민족(大韓民族)이 전부 각성하였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에게는 홀로 생존권이 어찌 없을 것인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인(韓人)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神)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해방, 부인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새벽에 어느 집에서 닭이 울면 이웃집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다른 닭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때가 와서 우는 것이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적으로 발작한 것이 한국의 독립운동이다.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 신은 오직 평화와 행복을 우리에게 주려 한다. 과거의 약탈과 살육을 중지하고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 신의 뜻이다. 세계를 개척하고 개조로 달려나가 평화적 천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명이다. 우리의 선조는 칼과 총으로 서로 죽였으나 이후로는 서로 붙들고 돕지 않으면 안된다. 신은 세계의 장벽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에 일본이 자유를 부르짖는 한인(韓人)에게 순전히 자기 이익만을 가지고 한국 병합의 필요를 말했다.
 
첫째, '일본은 자기방위를 위하여 한국을 병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차제(此際)에 무너진 이상 그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이 독립한 후라야 동양이 참으로 단결할 수 있다. 실상 일본의 의도는 자국의 이익을 위했던 것이었을 뿐이다.
 
둘째, '한국은 독립을 유지할 실력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과연 국방을 위한 병력이 없다. 그러나 이제 한민족(韓民族)은 깨었다. 열화같은 애국심이 이제 폭발하였다. 붉은 피와 생명으로써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하려는 것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한국에게는 적이 없다. 서쪽 이웃인 중화민국은 확실히 한국과 친선할 것이다. 일본이 솔선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날이면 한국은 마땅히 일본과 친선할 것이다. 우리의 건설국가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을 다스리는 국가일 것이다. 이 민주공화국은 대한민족의 절대적 요구요, 세계 대세의 요구다. 평화란 것은 형식적 단결로는 성취하지 못한다. 이제 일본이 아무리 첩첩이구(睫睫利口)로 일중친선(日中親善)을 말하지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오직 정신적 단결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동양인이 이런 경우에 서로 반목하는 것이 복된 일인가? 한국의 독립문제가 해결되면 중국문제도 용이하게 해결될 것이다. 일찍이 한국독립을 위하여 일청전쟁(日淸戰爭)과 일로전쟁(日露戰爭)을 했다고 하는 일본이 그때의 성명을 무시하고 스스로 약속을 어겼으니 한화(韓華) 두 민족이 어찌 일본에 대해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국독립은 일본과 분리하는 듯하나 원한을 버리고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 함께 나가고자 하는 것이니 진정한 합일(合一)이요, 동양평화를 확보함이며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제일의 기초이다. 우리는 꼭 전쟁을 하여야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싸우지 않고는 인류가 누릴 자유와 평화를 못 얻을 것인가? 일본 인사들은 깊이 생각하라."
 
이날 몽양의 명연설이 끝나자 연단 아래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취재를 위해 동경 제국호텔에 모여든 일본 기자들도, 조선의 독립운동 인사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들어보기 위해 회견장을 찾은 일본의 지식인들도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몽양의 외침에 감명을 받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당시 몽양을 수행했던 최근우(崔謹愚)는 몽양의 연설이 끝난 이후 일본의 시사잡지 '태평양'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이론이 명쾌해졌다.'는 내용의 논설을 게재했다고 증언했다.
 
몽양이 여러 일본 정치권 요인들과 회담을 갖고 제국호텔에서 연설을 한 내용의 기사가 매일같이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의 진보적인 교육자와 학생들은 큰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요시노[吉野作造] 동경제국대학 교수가 주관하는 신인회(新人會)라는 학술단체에서는 몽양을 위한 환영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환영회에는 오스기[大杉榮], 모리토[森戶], 야마자키[宮岐龍介] 등 100여명의 일본 대학생 100여명이 모였고, 중국인과 한국인 학생도 일부 참석했다.
 
몽양은 이 자리에서 인사말을 하였다.
 
"조선독립운동은 일시적인 감정적 폭발이 아니다. 이는 오직 조선인의 영구적 자유와 발전을 위해서이며 나아가서는 동양과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이다."
 
이에 사회를 맡고 있던 야마자키가 답하였다.
 
"여(呂) 선생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안심이 된다. 조선독립운동이 민족적 감정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불안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진실로 여 선생의 말씀과 같이 조선독립이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조선이 독립함으로써 일본과 조선이 서로 화평할 수 있다. 일본인 중에도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달라."
 
연회는 시종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폐회에 앞서 오스기의 선창으로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몽양 일행의 감격은 여간 높았던 것이 아니었다.
 
요시노 교수는 다음해 1월 '중앙공론(中央公論)'이라는 월간잡이에 '소위 여운형사건에 관해서'라는 시론(時論)을 발표했다. 이 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여씨의 주장 가운데는 확실히 하나의 침범하기 어려운 정의의 섬광(閃光)이 보인다.(중략) 나는 한낱 젊은 신사인 그의 견식과 품격에 있어서 드물게 보는 존경할 만한 인격을 발견했다. 중국, 조선, 대만 등지의 많은 사람과 회담했지만, 여운형은 교양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자로서 그 중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언한다.'
 
코가[古賀庚造] 척식국장관(拓殖局長官), 미즈노[水野鍊太浪]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무총감(政務總監), 다나카[田中義一] 육군상(陸軍相) 등을 위시한 일본 군국주의 수뇌부는 몽양을 동경까지 초청한 목적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일본 한복판에 선전, 확대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당초 예정되었던 총리대신(總理大臣) 하라[原敬崇] 수상(首相) 및 마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일본 황제와의 회담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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