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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나는 정치적으로 타살당했다."
박근혜와손학규... "대통령의 직책에 대한 투철한 인식 없어"
 
조선일보 기사입력 :  2011/07/10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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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이한우의 聽談] 大選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 박찬종

  • 기사100자평(93)

    입력 : 2011.07.09 03:03 / 수정 : 2011.07.09 13:31

    "그때(1997년 대선) 대통령 됐다면…생각만 해도 끔찍"

    “나 같은 사람을 왜 인터뷰하려고?”

    그러면서도 박찬종(朴燦鍾) 변호사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1939년생이니 그도 벌써 70 고개를 넘었다. 정치인 중에서는 김중권 김혁규 이수성 장상 한화갑 등이 동갑이다. 72살이면 정계를 은퇴했거나 은퇴를 눈앞에 둔 나이다.

    인터뷰 대상으로 '박찬종'을 떠올린 것은 대한민국이 5년에 한 번씩 앓아야 하는 열병이 슬슬 도지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선 전(前) 지지율 1위의 원조(元祖)이자 여당에서 야당으로 당적을 바꿔 정치적 성공을 거둔 정치인이기도 하다. 현재 여야를 대표하는 박근혜 전 대표와 손학규 대표의 미래를 읽어내는 데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그를 만난 날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저 당심(黨心)이라는 게 다 엉터리야. 나경원이 보라고. 국민 지지 많아도 의원들 지지 못받으면 아무 소용없어. 당이 그만큼 국민과 동떨어져서 굴러가는 거지."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1997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경남중,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사법과(사법고시)와 행정과(행정고시)에 이어 공인회계사 시험도 합격했다. 그후 잠시 검사생활을 거쳐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소선거구제)에서 여당인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야당의 거물 정치인 김영삼(金泳三)과 맞붙어 패배를 맛보지만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이듬해 열린 9대 국회의원 선거(중선거구제)에서 김영삼에 이어 2위로 당선돼 국회에 입성한다. 34살 때였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공화당에 큰 위기가 몰려왔다. 그는 오유방 의원 등과 함께 당 쇄신을 위한 정풍(整風)운동을 주도했고 결국 이듬해 4월 제명당한다. 그러나 그도 정치규제대상 811명에 포함돼 1981년 11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못한다. 전화위복(轉禍爲福). 숨겨진 야성(野性)을 되살려내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다시 국회에 진출한 그는 각종 인권관련 업무를 진두지휘했고 박종철군 사망사건 진상규명위원장으로서 박군의 사인(死因)이 고문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데도 앞장섰다.

    ▲ 박찬종 변호사는 “다음 대선에서 유력후보로 거론되는 박근혜 전 대표나 손학규 대표의 입에서 정치를 어떻게 개혁하고 법조비리와 재벌문제를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없다”며 “그걸 피하려다 보니 조삼모사(朝三暮四)식의 복지 포퓰리즘으로 국민들을 현혹하려 하는 것 아닌가”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정풍으로 유신잔당 논란을 피한 그에게 더 큰 위기가 찾아온다.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이었다. 그는 단일화를 요구하는 삭발농성으로 맞섰으나 역부족, 그럼에도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서초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이철 홍사덕 조순형 등 양김에 맞섰던 '7인의 서명파' 중 유일하게 당선됐다. 여세를 몰아 9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이 때부터 그는 '미스터 클린'이라는 긍정적 이미지와 '독불장군'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동시에 얻게 된다. 대중들은 그에게 환호했다. 정치인으로서는 파격적으로 '무균질 우유'광고에 등장할 만큼 깨끗한 정치를 향한 국민들의 염원은 그에 대한 지지로 표출됐다.

    우여곡절 끝에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한 그는 이듬해 초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달렸으나 정작 당내 경선을 앞두고 '당심'을 확보하는데 실패해 경선 직전 후보를 사퇴했다. '1997년'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정치적으로 타살당했다."

    ―가수 심수봉씨의 노랫말을 빌리자면 '대선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으로 요즘 언론에 종종 언급되던데.

    "또 그 이야긴가. 하긴 나도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언짢았는데 이제는 그냥 웃어넘기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바로잡을 게 있다. 나는 여론의 지지도 1등을 달리다가 국민들이 지지를 철회하여 굴러떨어진 것이 아니라 당의 경선규칙이 잘못돼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한나라당 정도의 경선규칙만 있었어도 무조건 내가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었다."

    ―정치인에겐 조직력도 중요한 자질 아닌가?

    "그런데 인간적인 유대를 넘어서는 게 돈이더라. 대선 끝나고 이회창 쪽에서 돈 얼마나 썼는지 다 드러나지 않았나? 차떼기는 이미 나와 경선할 때부터 시작됐다. 민정계 구(舊)정치인들은 내가 되면 자신들이 제거될 것 같으니 이회창 후보와 결탁해 나를 정치적으로 타살했다. 그것이 '1997년' 일의 본질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때 내가 여론조사 1등을 달리니까 민정계는 세대교체 공포에 사로잡혔다. 솔직히 나도 정권 잡으면 전두환 밑에서 세게 붙어먹은 놈들 몇몇은 제거할 생각이었다. '킹 메이커'라는 김윤환씨는 노골적으로 나에게 회유와 협박을 했다. '두 분 나이 차이가 5년(정확히 4년)이니 이 후보가 먼저 하고 다음에 박 후보가 하면 우리가 10년은 계속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다. 그들을 과소평가한 것이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때는 아들 현철씨가 한보게이트에 연루돼 YS의 지지도는 한 자리에 머물렀다. 말로는 도와 주겠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었다. 게다가 민정계와 이회창후보측은 이런 YS를 계속 몰아세웠다. 이미 기득권세력이 돼버린 민주계도 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고. 고립된 거지."

    ―그때 후보가 됐으면 대통령이 됐을까?

    "당연하지. 나야 영남의 기반이 튼튼한데다가 서울과 수도권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고 진보성향의 젊은이들까지 나를 지지했다. 그러면 호남과 일부 좌파진영 말고 DJ표가 어디서 나왔겠나?"

    ―대통령이 됐으면 성공한 대통령이 됐을까?

    "그게 좀 그런데. 난 실패한 대통령이 됐을 것이다. 지금 그 생각하면 끔찍하다. 나야 특장이 부패척결 하난데 솔직히 그때 나는 부패하지 않게 정권을 유지하는 방안을 갖고 있지 못했다. 지금 벌어지는 부패상을 봐라. 그때는 훨씬 더했는데도 그것을 척결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달려들었으니 분명히 실패했을 거다. 게다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었다. 아마 그때 대통령됐으면 우쭐해서 옆에서 아부 아첨 하는 놈들한테 휘둘렸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 놈이 대통령 됐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보니 사람보는 법이 보이더라. 그런 점에서는 내가 그때 대통령 안된 게 나를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나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그렇게라도 자위(自慰)하며 분한 마음을 달래보려는 뜻도 좀 있고."

    ▲ 1987년 양김(김대중·김영삼)의 단일화를 주장하며 삭발 농성을 하고 있는 박찬종 변호사. / 연합뉴스
    “대통령은 국민을 통합하는 자리다.”

    ―청와대 문턱까지 가본 정치인으로서 역대 대통령들은 어떻게 보나?
    “이승만 대통령이야 화려한 독립운동 경력으로 된 것이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목숨 걸고 무력으로 잡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헌법적 정당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정책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고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한다. 절차적 민주화를 시작한 ‘87년 체제’로 인해 그때부터 헌법적으로는 40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대통령에 나올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대통령에 관한 한 ‘국민적 특허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둘은 어떻게든 건너뛸 수가 없었다. 우리가 분열의 책임을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던 것도 두 사람은 특허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두 사람 다 특허없이 대통령이 됐다. 그런데 지금 보면 둘 다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들은 이를 통해 학습을 하고 있다.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돼서는 안 된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두 사람은 대통령이 뭐하는 자리인지 모르고 대통령이 됐고 현재의 유력후보인 박근혜나 손학규도 대통령이 뭐하는 자리인지 모르고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는 것같다. 막연히 내가 하면 이전 대통령들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도전하고 있고 국민들은 그런 수준에서 판단을 한다. 이래서는 안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대통령은 후보와 국민이 함께 만들어내는 자리다. 후보도 그 자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있어야 하고 국민도 대통령의 자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서 투표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또 실패한다.”

    ―대통령은 어떤 자린가?

    “대통령은 국가원수(元首)다. 이는 행정부 수반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 헌법 수호의 책임을 진다. 국민통합의 상징이며 실천자를 의미한다. 87년 새 헌법을 만들 때 내가 제1야당 정책위 의장이면서 헌법특위 당 간사였다. 우리 당에서는 권위주의 냄새가 난다며 국가원수 부분을 없애려 했지만 내가 살려놓았다. 오랜 권위주의의 후유증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갈등, 지역갈등 등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국민통합적 기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관철시켰다. YS와 DJ는 특허가 있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자각이 없다. 국가원수가 어떻게 강남·강북을 가르고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으로 나눌 수 있나? 그런 자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떻게‘고소영’ 내각을 구성할 수 있나?”

    ―그런 관점에서 박근혜 전대표나 손학규대표는 어떤가?

    “두 사람이 지금까지 보여주는 행적으로 봐서는 방금 말한 대통령의 직책에 대한 투철한 인식은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노무현·이명박 두 대통령을 거치면서 더 이상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두 사람 중 누가 된들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개선될 것인가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다. 이대로 가면 대선 투표율은 지난번보다 더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박근혜 대세론이 워낙 강하지 않나?

    “그건 다음 대선에 투표하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것이고. 지금 국민의 정치혐오는 한계상황에 처해 있다. 정치혐오가 더 깊어지고 그런 국민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후보가 나온다면 판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대세론은 무슨. 한나라당 의원들 어느새 친이(親李)에서 친박(親朴)으로 줄 바꿔 서는 것 봐라. 민주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민이 다 지켜보고 있다.”

    “지금도 유전무죄(有錢無罪) 유권무죄(有權無罪)와 싸우고 있다”

    ―누가 되건 다음 대통령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문제는 뭐라고 보나.

    “국회의원 수를 200명으로 줄이고 감사원을 국회로 가져와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비례대표는 없애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 직업군이 2만개다. 비례대표 하려면 2만명으로 해야 할 판이다. 200명의 국회의원 기능을 강화해 비례대표 기능은 흡수하면 된다. 박근혜나 손학규가 이걸 손댈 수 있을까?

    지방자치에 정치가 개입하면 안 된다. 서울시 싸우는 꼴 봐라. 기초단체의원은 무보수 명예직화해야 한다. 그런데 안 한다. 돈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당공천해야 국회의원은 시·도의원 쥐어짜고 시·도의원은 기초의원 쥐어짠다. 박근혜나 손학규가 이걸 손댈 수 있을까?

    대통령 직속 위원회 수십개 중에 ‘지방자치’ 붙은 것만 3개다. 이게 다 낭비다. 286개 공기업 CEO와 감사 면면을 보라. 대차대조표도 모르는 한나라당 부대변인 출신 감사만 10여명이다. 이거 두 유력후보가 손댈 수 있겠나? 이게 내가 늘 만나는 일반 국민들이 정치권을 향해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다.”

    ―왜 못하나?

    “대선 과정에서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정당은 간판만 빌려주는 것이고 선거는 각각의 사조직이 다 한다. 민주산악회부터 노사모까지 다 그랬다. 대선 과정에서 황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온갖 명칭을 내건 단체 아래로 몰려든다. 그런데 한국의 대통령은 5년짜리인데다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기간은 3년 정도다. 그 기간 안에 선거 ‘공신’들을 챙겨줘야 하는데 과부하(過負荷)가 걸릴 수밖에 없다. 이 잘못된 구조를 지적하는 후보를 본 적이 있는가? 그러면서 결국 자신들도 그런 덫에 말려 들어간다. 이걸 다 아는 국민이 어떻게 그런 후보들에게 기대를 하겠는가?”

    ―요즘 트위터에 열심히 글을 쓰던데 주로 그런 내용들이더라.

    ▲ 1997년 7월 신한국당 합동연설회에서 박찬종 변호사(당시 고문)가 대통령 경선 후보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경선에 참가한 이한동·이인제·김덕룡·이수성·이회창·최병렬 후보(앉은 자리 왼쪽부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를 듣고 있다.
    “2004년 총선 때 부산에서 무소속으로 낙선한 후 나는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한 2년 무위도식하며 푹 쉬고 놀았다. 2006년 무렵 주변에서 글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나 같은 사람 신문에서 받아줄 리는 없고 그래서 블로그에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쓰기 시작했다. 가끔 민감한 걸 쓰면 조선일보에서도 인용해주고 그랬다. 작년 5월부터 트위터를 시작했다. 우선 짧아서 좋았고 반응이 빨라서 좋더라. 지금까지 쓴 글이 1100개가 넘는다. 매일매일 속 터지는 기사가 나오니 뭘 써야 할지 걱정할 일이 없었다. 청와대·여야·박근혜·손학규·검찰·법원·국세청…. 오늘도 두 개 쓰고 나왔는데 ‘고위직 출신들이 명예를 위해 가난하게 살아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브로커가 돼서는 곤란한 것 아니냐’는 내용이다.”

    기사 작성 중 그의 트위터에 들어가 보니 또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한나라당… 친이·친박이 생긴 것은 공천 싸움 때문이다. YS·DJ계는 독재권력과 싸울 때 선명성 경쟁에서 생성된 것인데,이제 끝났다. 계파는 필요악이 아닌 반국민적 위헌적 존재다. 국민 의사를 반영한 상향식 공천제도로 개혁하여 계파싸움을 끝내라. 국민이 나서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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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위터는 다 직접 쓰나?

    “읽어보면 알 수 있지 않나? 다 내 손으로 쓴다. 우리 집사람은 지금도 성당에서 홈페이지 관리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우리 아들놈이 국책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내가 아무런 성역(聖域) 없이 써대니까 ‘아들한테 영향이 있으면 어떻하려고 그러냐’고 걱정하길래 ‘그러면 내가 당장 청와대에 휘발유통 메고 달려갈 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주로 정치 비판인가?

    “아니다. 사법개혁과 재벌개혁도 중요 관심사다. 전관예우 문제와 삼성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법조인과 삼성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부정적 인식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두렵다. 내 트위터에는 ‘유전무죄(有錢無罪) 유권무죄(有權無罪)가 사라지는 그 날을 위해’라는 모토가 걸려 있다.

    ―정치의 꿈은 완전히 접었나.

    “지금 내가 뭘 하겠나? 완전한 자유인이다.”

    ―요즘은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

    “몇몇 사건 변론도 하고 후배들하고 만든 연구원도 좀 챙기고. 참 내가 2004년부터 BMW다. 버스(bus) 타고 지하철(metro) 타고 걷고(walk). 그러나 국민교육은 내 평생의 ‘일’이다. 트위터 안 나왔으면 서울역 같은데 차를 마련해 ‘박찬종과의 대화’를 하려했다. 내가 노상토론의 창시자 아닌가? 그런데 세상 좋아져 트위터가 그보다 몇십배 몇백배 위력을 발휘한다. 김영란 대법관 그만둘 때 내가 전관예우 포기한 그를 칭찬한 글은 200만명이 읽었다. 조선일보 독자 정도 되는 것 아닌가?(웃음)”

    “회한(悔恨), 있지만 어떻하겠나?”

    ―정치에 대한 꿈은 언제부터 가졌나?

    “선친은 은행원이었다가 해방 직후에 그만두고 부산에서 국회의원 3번 연속 당선된 사람의 사무장으로 일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경남중 3학년 때 직선제 학생회장을 했다. 고등학교 때도 신문을 열심히 봐서 비판의식을 키웠고 친구들 사이에 ‘국회의원 인명사전’으로 불렸다.

    누구 하면 어디 출신이고 경력은 뭐고 하는 것이 줄줄 나왔기 때문이다. 그 무렵 한 신문에 존 F. 케네디의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책이 압축 연재됐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 책에 소개된 태프트 의원이었다. 그는 나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한 소급법에 반대했다. 나치가 아무리 미워도 미국의 가치에 반해 소급입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 바람에 그 사람 대통령 안됐지만 그의 소신이 멋있었다. 그때는 이승만의 자유당에 반대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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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공화당으로 출발하지 않았나.

    “박정희 대통령과 가까웠던 집안 어른의 권유 때문이었다. 문화방송 사장이던 조증출씨가 검사로 일하고 있던 나에게 고향 지역구의 김영삼과 붙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워낙 거물이라 망설였다. 그런데 조증출씨가 ‘첫술에 배부르냐. 그 사람이야 대통령 되면 지역구 내놓을 텐데 가서 붙어봐라’고 해서 결심했다. 그런데 유신이 터진 거다. 졸지에 유신잔당에 휩쓸려들어갔지만 헌법비판 빼고는 여당 안의 야당으로서 할 말 다 했다.”

    ―훗날 민주세력에 합류했을 때는 좋았겠다.

    “나야 좋았지만 가족들은 별로였다. 이순자 여사와 우리 집사람이 고등학교 동기다. 보안사령관 시절 만난 적도 있다. 각종 자리를 권유했지만 끝내 버텼다. 장인어른께서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지’라며 그 점을 많이 안타까워하셨다. YS가 정무장관 제안했을 때도 거부했고 DJ가 오라 할 때도 거절했다. 이런 이야기는 그때 집사람에게 안 했다. 1996년 전국구 포기한 것 때문에 지금도 화를 내는데 그때 이야기했으면 당연히 하라고 했을거다. 장관·총리 하면 월급 나오고 차도 나오는데.”

    ―정말 후회 같은 것은 없나?

    “후회라기보다 회한 같은 게 있다. 왜 없겠나? 나도 사람인데. 그런데 돌이켜보면 정치적으로 실패했는지는 몰라도 인생은 실패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DJ의 제안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 자리를 대신 꿰차고 들어간 사람이 있다. 그 사람보다야 내가 낫지 않나. 얘들 평범하게 잘 자라주었고.”

    그는 아직도 10억원이 넘는 빚에 시달리고 있다. 의원 연금 100만원 중 절반은 채권자가 꼬박꼬박 가져가고 있다. IMF 위기를 함께 겪는 대통령이 될 뻔했던 노(老)정객은 그러나 건강했다. 몸도 건강했지만 ‘미스터 클린’의 면모는 조금도 쇠하지 않은 듯했다.

     



    ▲ 대선후보로, 국회의원으로 현대정치사를 살아온 박찬종변호사가 4일 서울 서초동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정치비화와 소신을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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