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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지수↓·자살률↑ '한국의 몰락' 미래는 더 끔찍
3년째 아동과 청소년이 가장 불행한 나라… 살인적 경쟁교육은 저출산·사회붕괴로 이어져...게다가 북한 붕괴까지 덮치면 어찌될까?!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1/07/3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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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만능주의가 몰락을 부른다

[중앙일보] 입력 2011.07.31 10:20 / 수정 2011.07.31 10:38

한국의 몰락 가능성 짚은 두 지식인의 시각 - 강인규

월간중앙 최하위 행복지수,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출산율…. 재미학자 강인규 교수는 이대로의 한국은 미래가 더 끔찍하며, 끝내 몰락을 면치 못한다고 주장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배려와 협력만이 살길이란다.

3년째 아동과 청소년이 가장 불행한 나라… 살인적 경쟁교육은 저출산·사회붕괴로 이어져
열악한 복지·신뢰부재의 한국 사회 안전판 구실한 경제성장과 가족제도 제 기능 끝나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모 일간지가 올해 초 ‘불행한 한국인’을 신년 특집기사로 내보냈다. 보도에 따르면 해외 전문기관들이 평가하는 행복지수에서 ‘한국은 언제나 꼴찌그룹’이다. 기사에 인용된 통계자료를 보면, 한국인 가운데 ‘매우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불과 7.1%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인은 그냥 불행한 정도가 아니라 삶의 의욕마저 잃었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가장 높다. 한국의 낮은 출산율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지만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간단하다. 불행하기 때문이다. 살아갈 희망까지 잃은 불행한 국민들이 자식을 부지런히 낳아 기르기를 바랄 수는 없다.

불행한 국민도 큰 문제지만 인구학적으로도 한국은 소멸위기를 맞았다. 옥스퍼드대학의 데이비드 콜먼 교수는 한국이 현 출산율을 유지할 경우 인구감소로 사라지는 첫 번째 나라가 되리라 예측했다. 이 분석은 최근 공개된 유엔 인구전망 보고서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 보고서는 2100년까지 한국 인구가 1100만 명 이상 줄어든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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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는 어떤가?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조사를 보면 한국 아동과 청소년들의 행복지수는 OECD 23개 국가 가운데 최하위였다. 그것도 꼴찌에서 두 번째인 헝가리와 큰 격차를 보였다. 벌써 3년째 ‘아동과 청소년들이 가장 불행한 나라’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하루아침에 불행해지진 않았다. 그러나 불행한 청소년들은 더욱 불행해져간다. 청소년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2006년에 ‘행복하다’고 답한 고교생 비율은 13.7%였다. 올해 이 비율은 11.7%로 추락했다. 한국 사회를 물려받을 젊은이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이 불행하다는 말이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미래와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미래가 더 끔찍한 나라
한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강력범죄다. 한 사회의 범죄는 복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미국의 멜리사 부렉 교수에 따르면 복지투자를 늘리면 강력범죄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반대로 복지가 줄면 범죄는 늘어난다. 사회통계학적으로도 경제불평등도가 높은 사회의 범죄율은 높다.

아동과 가족에 쓰이는 한국의 사회적 투자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도 걱정스럽다. 가족과 아동에 쓰이는 돈은 미래 빈곤층을 줄여 국가 경제를 보호하고, 범죄를 예방해 사회를 안정시키는 선제투자의 역할을 한다. 복지는 일부 계층에만 좋은 ‘선심’이나 ‘돕기’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혜택을 입는 현명한 대비책이다.

우리가 지금 ‘포퓰리즘’이네 ‘좌파정책’이네 하며 복지투자를 미루는 것은 미래를 어둡게 할 뿐 아니라 결국 몇 배에 해당하는 비용을 가장 어리석은 방식으로 쓰게 만든다. 늘어난 범죄로 인해 치안을 강화하고, 교도소와 안전설비를 늘리는 데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도 국민들은 여전히 밤거리 걷기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경제만능론’이 횡행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믿음이 강하다. 서구 선진국마냥 1인당 국민소득 3만~4만 달러가 되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새 시대가 열릴까? 하지만 미국은 국민소득 4만 달러가 넘지만 세계 최악의 범죄국가다. 평균소득은 높아도 경제불평등도가 높고 복지투자 비율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의 복지투자는 그런 미국보다도 열악하다.

국민소득이 늘면 행복해지기는 할까? 한국갤럽은 1992년과 2010년 사이의 소득과 행복지수 변화를 조사했다. 이 시기에 1인당 국민소득은 300%나 성장했으나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오히려 10% 줄었다. 한국 정부의 유일한 꿈인 ‘국민소득 4만 달러’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최근 복지를 둘러싸고 정치권의 논란이 뜨겁다. 한쪽은 복지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은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한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은 복지정책을 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경제력 세계 14위인 한국이 복지투자 비율은 OECD 34개 국가 중 최하위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 포퓰리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치안도 머잖아 허물어진다
한국은 비교적 치안을 잘 유지해온 나라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안정된 치안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그동안 한국 사회를 지탱해준 사회적 보호막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어느 나라 사람보다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공권력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범죄율은 매우 낮았다. 많은 외국학자들은 이 ‘기이한’ 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정부의 철권통치적 억압이 범죄를 억제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독특한 가족제도 때문이다.

경제성장은 그 자체로 범죄를 막지 못한다. 그러나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초고속 경제성장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쉽게 생산활동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 때문에 정부가 복지에 신경을 쓰지 않았어도 극단적 소득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못한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안전망은 가족이었다. 가족이 정부의 기능을 대신한 셈이다. 과거 ‘산업화 세대’가 높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쉽게 일자리가 구해졌기에 가능했다. 과거의 주요 산업은 고도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집약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한국 사회를 힘겹게 지탱했던 고도성장과 가족이라는 두 보호막은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불가능하며, 가족이 사회안전망 기능을 대신할 수도 없다. 산업세대 가장은 은퇴했고 산업구조는 재편되었으며, 경제성장은 고용과 재분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경제가 성장해도 고용은 늘지 않고 양극화가 커지는 현상이 이 점을 입증한다. 자식은 부모 세대보다 훨씬 높은 교육을 받았어도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부모와 형제는 이들을 보살필 경제력이 없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정부가 감당해야 할 복지 의무를 국민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 가족은 이제 그럴 여력이 없다. 부모가 자식을 안고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자식이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모에게 흉기를 휘두른다. 노부모가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죽음을 택하고 있다. 정부는 이 현실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 건가?

경쟁만능주의가 불러온 비극
신뢰의 부재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 따르면 한국의 신뢰도는 지난 30년간 꾸준히 떨어졌다. 1980년대만 해도 ‘남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40% 가까이가 긍정적으로 답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 이 수치는 20%대로 반 토막 났다. 멀쩡한 사람들이 서로 믿지 못하게 됐다. 관련 연구를 보면 ‘경쟁’ 이나 ‘부’가 사회적 신뢰도 하락을 부추겼다. ‘부의 획득이 타인의 희생에 근거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적 신뢰도는 낮아진다.

한국인은 부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들 흔히 생각한다. 완전한 오해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자 인사인 나라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문제는 부의 획득과 분배가 공정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 데서 온다. 오죽하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마저 재계에 ‘공정’과 ‘상생’을 주문하겠는가?

한국식 경쟁교육도 문제의 진원지다. 협력과 배려를 모른다. 학교에서는 남을 밟고 서도록 가르치고, 가정에서는 ‘기 안 죽도록’ 교육한다. 동료는 투명인간으로 존재하거나 진로를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결국 한국 교육의 목표는 이기적이고 뻔뻔한 사람을 길러내자는 것이다. 이렇게 자라난 청소년이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이웃과 조화롭게 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경쟁교육의 폐해는 올해 3월 발표된 국제교육협의회 연구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국 학생들의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지표’는 0.31점으로 35개 조사국 가운데 꼴찌였다. 관계지향성과 사회적 협력 부문의 점수는 아예 0점이었다. 한국 교육이 개인의 행복만이라도 보장하면 좋으련만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맨 밑바닥이다. 결국 한국 학교와 가정은 남을 파괴하고, 자신도 불행한 국민을 길러내는 셈이다.

최근 고려대 의대생들의 성추행 사건을 보라. 남자 세 명이 의식을 잃은 동료 여학생을 집단으로 성추행하고 이 장면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이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명문대 재학생’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국식 경쟁을 성공적으로 체화한 사람들일수록 약자를 배려하기는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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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 대한 배려=사회경쟁력
살인적 경쟁교육은 저출산을 불러 사회붕괴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조선일보> 1월 14일자 기사를 보면 저출산의 이유로 20대 여성 47%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19%가 ‘아이를 고통스러운 세상에 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50대 여성에서 이 비율은 더 높아져 각기 53%와 20%에 달했다. ‘국가경쟁력’의 명분으로 합리화해온 경쟁교육이 오히려 사회를 저출산·자살·불행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식 경쟁교육은 미래 국가경쟁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키피디아·플리커·앱스토어·트위터·페이스북의 성공에서 보듯, 뉴미디어 시대에는 ‘나눔’과 ‘배려’가 새로운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교류를 통한 공동작업, 즉 ‘협업’은 소셜미디어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미국 뉴미디어 잡지 <와이어드> 2009년 6월호는 ‘신경제체제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신기술이 공동체의 협력과 나눔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경제 모델을 만들어낸다고 보도했다.

내가 나누면 남도 나누고 공동체도 번영한다. 미래형 인재는 이렇게 돕고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형 인간’이다. 협력이 생존의 조건이다. 서로 밟고 밟히는 곳에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앞에서 예로 든 위키피디아·트위터·페이스북 등 세계를 휩쓰는 소셜미디어는 모두 미국에서 나왔다. 미국이 뉴미디어 기술과 활용에서 선두를 달리는 이유가 있다. 미국 학교는 협력과 배려를 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미국 학생들은 협력이 필요한 공동과제를 일상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각 구성원이 다른 사람의 필요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도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한 사회에 나눔과 배려가 얼마나 정착되어 있는지는 약자가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보면 된다. 미국의 경우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부의 불균형에서 오는 치안 불안이 피해야 할 ‘반면교사’라면, 약자에게 보이는 배려와 관심은 한국이 주목하고 배울 만한 부분이다.

미국의 모든 공공건물과 교통수단은 장애인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버스가 정차하면 차체가 승차장 높이로 낮아져서 휠체어로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대형버스의 접근이 쉽지 않은 지역에는 장애인 전용 소형버스가 운영된다. 장애인들은 각자의 필요에 맞춘 교육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고, 학교와 정부는 이를 무상으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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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 힘겨운 권리후진국
장애인이 이런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한 것은 미국 공화당 정부였다. 1990년 부시 행정부가 ‘미국 장애인 보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을 입법화했기 때문이다. 이 법은 막연히 ‘차별을 금한다’는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의무조항을 담았다. 예컨대 “상점과 식당 등 대중시설의 출입문은 최소한 32인치 이상 열려야 한다”는 식이다. 전화나 컴퓨터 등 통신기기 제조업체는 장애인이 쉽게 쓰도록 특정기능을 의무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미국 대기업의 경우 장애인 보호법 위반 자체가 심각한 기업 이미지 손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거의 강박에 가까울 만큼 장애인 시설에 신경을 쓴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2008년4월, 전국경제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는 정부에 정반대의 요구를 했다. ‘기업활동에 방해가 된다’며 직장 내 성희롱 처벌 완화와 장애인 채용 의무 완화를 요구했다. 이에 정부는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한국 기업과 정부의 수준이 이렇다. 한국 정치권과 재계는 입만 열면 ‘세계화’와 ‘국제경쟁력’을 외치지만, 아직 국제 상식 수준의 배려도 익히지 못했다. 국내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기업들은 해외시장에서 법적·도덕적 비난과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 적절한 규제는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꼭 필요하다.

결국 몰락하는 한국 사회를 구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남을 돕고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학교·정부·기업이 발벗고 나서는 길이다. 학교는 협력과 배려를 가르치고, 정부는 소외받는 사람들을 법과 제도로 보호하며, 기업은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함으로써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한국이 맞을 미래는 사회 붕괴뿐이다. 사회가 살아남아야 기업도 살아남고 정치도 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왜 배우고, 왜 돈을 버는가? 행복하고 사람답게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한국의 위기가 주는 교훈은 다른 이들이 행복해야 당신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남을 배려하면 남도 당신을 배려한다. 이 좋은 걸 왜 마다하는가?


 
강인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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