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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일성은 호치민이지못했는가? ...
"내재적 접근"이란 유령이 진보세력에 떠돌고 있습니다.
 
만파식적 기사입력 :  2008/11/16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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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일성은 호치민이지못했는가? ...대단히 좋은글[펌]

참조:민주 노동당 자유게시판 - 1월14일 새벽
글쓴이: 만파식적

제목:왜 김일성은 호치민이지못했는가?

"내재적 접근"이란 유령이 진보세력에 떠돌고 있습니다.
그 발생배경이야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제가 계속 말하듯이 민주주의라는 보편가치쳬계를 훼손시키는 "의도하지않는 결과"나을수 있다는거를 우려합니다.

사실 내재적 접근론은 학문적 개념일순 없습니다.
그건 극단적 오리엔탈리즘이거나 아니면 "이광요"가말하는 "아시아엔 아시아적 가치 아시아적 인권이 있다"거나 박정희가 말하는 "한국엔 한국적 민주주의가 있다. 그래유신이다"라는 총통제나 이슬람적 문명과 원리를 절대시하는 "이슬람원리주의정권"과 결과적으로 유사해질수도 있다는게 제우려이고 또 수령체제가 그렇게 이미 갔으며 대량식량난과 대거 탈북이 이를 증명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북한사회는 결과론적인 이런 비판말고 다른식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 사회의 발생배경이 틀리니까요

현실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소동구식 레닌주의모델은 거의 망했고 제3세계민족해방정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즉 북한정권을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세력이 건설한 정권이란 측면에서 그런 사회란 측면에서 출발하는건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게 자주대오가 말하는 "미제와 맞서싸워 사회를 유지한 탁월함" "자주노선을 택했기에 다른 사회주의국가와 달리 체제를 발전시키고 있는 현명함"으로 판단할수 있는 출발점입니다.

근데말이죠.

동아시아나 제3세계민족해방정권은 어느나라든 모두 소련과 일정한 거리를 취한 자주노선이었습니다. 중국 베트남 쿠바 유고등등 말이죠. 큰맥락속에선 북한정권도 이에 속합니다. 적어도 50년대 까진 북한도 이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주노선을 넘어 주체사상으로 넘어가면서 변별점이 다릅니다. 현실사회주의정권은 어느나라나 직접선거로 지도자를 뽑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적 다원주의에대한 인식의 부족"이죠.

이는 가장 평가받는 베트남의 호치민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북한정권의 자주노선의 변종으로써 "수령론"은 이를 넘어서고 있다는게 문제입니다. 그정도의 인식이 아니라 세습과 지도자숭배까지 나아가고 있다는거죠.

전 제3세계 민족해방정권이 레닌주의적 소동구모델과 달리 독특한 민족해방운동의 투쟁역사의 경험으로 민중과 통일전선체 또는 당 또는 인민권력사이에 강고한 유대감및 신뢰를 형성할수 있었다는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이라고 보며 많이들 제기하는 북한정권의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역시 이런맥락속에 봐야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신뢰감과 유대라는게 일종의 투쟁경력의 "권위적 상징"인데 이 상징적 권력이 감시장치나 견제장치가 없으면 부패하게됩니다. "소동구보다 인민권력에대한 인민의 신뢰가 높아서 망하진않았지만 비슷한 부패와 관료주의 권력독점현상"을 낳고있다는거죠.

즉 민주주의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거에대한 경로와 접근방식이 다를뿐이지, 사회를 분석하는 잣대가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거 라든지 어떤 구체적 지역의 문명적 가치에 맞는 "북한식이든 이슬람식이든 아시아적이든"하는건 없습니다.

사회를 분석하는건 오로지 민주주의적 보편잣대와 그의 구체적 조건으로써 각사회를 보는 "눈"이상이 아닙니다.

자 북한사회를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정권의 한 변형으로써 본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의문은 이겁니다. 왜 북한은 비슷한 조건에 있던 베트남과 달랐는가?
왜 미국과 똑같이 전쟁을 치루었고 똑같이 분단을 경험했으며 똑같은 사상이념으로 유지되던 베트남과 달랐는가 이겁니다.

왜 베트남의 호치민은 미국과의 포위정도가 아니라 반제전쟁 그당시에도 "사회적 생명론이니 수령과 인민은 같은 생명이니 부자세습이니"하는 이론을 만들지 않고도 오늘날 까지 체제를 유지할수 있었고 그래도 북한보다 더 나은 개혁사회주의를 만들어가고 있는가하는점입니다.

왜 호치민은 주석궁을 안세웠고 자신의 시신을 절대 부패하지않도록 해서 전시하는짓을 하지말라고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민들이 그런걸 좋은뜻으로 요구해도 후계자들이 존경심으로 그런 숭배비슷한걸 해도 그런 정서가 언젠가는 베트남을 갉아먹을것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북한정권에겐 그런 혜안이 겸손함이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지해서 한행동이라도 지도자가 죽었다고 모두 광장에 모여 히스테리컬하게 울게만드는 그런 촌극을 벌이지않게한 호치민의 사전예방책을 왜 김일성은 따라가지않았냐는 의문입니다.

제의문마저 잘못된걸까요?

"밥이아니라 이념을 선택한 북한인민을 존경하신다"구요?
범한총련정서에 있는 많은분들의 결론입니다.

저는 그런정서와 유사하지만 질적으로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런 정서는 이정도로 완화해야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전 호치민의 베트남이, 만델라의 남아공이 부럽습니다.
우리보다 경제발전은 "밥을 만들수 있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결정적으로 타락하지않은
지도자의 상징을 존경심(숭배가 아닙니다)으로 간직하면서 자신의 사회 자신의 민족에대한 자부심과 독립자존의 긍지로 이제 새로운 경제발전과 새로운 민주주의를 예비하고 있는 그들의 미래에대한 부러움입니다.

한반도는 그들보다 더 경제발전이 뛰어나지만 그런 요소가 부족하기에 사회전반에 진보적동력이 없습니다. 경제발전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기본적으로 합의된 가치지향이 없습니다. 수령론과 박정희신드롬만 난무할뿐입니다.

전 "밥보다 더 중요한걸 가진 미래로 열려진 지도자에대한 존경심과 그 지도자가 상징하는 한사회의 진보적 가치합의능력"을 지닌 베트남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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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도자... 2008.09.19 15:04 오드리될뻔


 
 

호치민
[胡志明(호지명),
ho chi minh, 1890.5.19~1969.9.3] 본명 : 박호


 베트남의 ·정치가, 구(舊)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시킨 베트남 민중의 영웅이고 뒤이어 베트남을 침공한 미국에 맞서 싸웠다.
베트남 군의 수장이자 통치자였으면서도 너덜너덜한 외투와 폐타이어로 만든 다 떨어진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어린이들과 놀아주는등 눈물겨울만큼 스스로를 낮추고 민중의 삶과 평생 함께 했다.
유고의 티토, 리비아의 가다피, 쿠바의 카스트로, 칠레의 아옌데…… 이들은 모두 제3세계의 유명한 지도자들이지만
이 가운데 아무도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대항하여 승리한 사람은 없었다. 오직 호치민만이 일대일로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정약용선생의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다고 하며, 호지명 박물관에 그가 읽었던 목민심서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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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당의 창건자이고 나중에는 베트남의 주석이었을 뿐 아니라, 영감을 불어넣는 최고의 상징이었다.
호치민은 빈틈없는 전략가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일 뿐 아니라 재능 있는 조직가로서, 반은 레닌이고 반은 간디였다.
호치민은 그 둘을 역동적으로 결합한 인물이었다.

- 호지명 평전 중에서/윌리엄 j. 듀이커

 

 

 
미국과의 전쟁, 베트남전 시절.
 
호치민은
수천명의 십대후반에서 스무살까지의 청년들을
구라파를 포함한 구소련,북한 등지에 유학을 보냈다.
 
전시상황에서 징집을해 전선으로
보내기가 급급한 시절에
요긴한 자원을 유학 보낸다는 발상이 놀랍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나라사랑의 절절한
사무침과 인간애가 깔려있음은 가히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가 국비까지 지원하며 유학을
보내는 청년들에게 했던말은,
 
 "조국은 우리가 통일을 시켜놓을테니
훗날 폐허된 조국을 너희들이 재건하라"
 
“앞으로 나라가 반드시 통일이 될터이니 통일조국을 이끌 실력을 길러라.

 최전선에서 전투하고 있는 동지들을 생각하며 전투하는 정신으로 국가경영의 실력을 쌓으라”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일렀다. “그대들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여야 외국에 나가 국가경영의 실력을 쌓고 있는 동지들이 미래에 일류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

 
현재 베트남의 중추세력은 그당시의
유학생 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라 사정이 혼란스러워질수록 지도자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지도자의 인격과 경륜의 정도에 따라 나라와 백성들의 사정이 달리지겠기 때문이다.

 

 

 호치민.

 그는 평생에 정적을 숙청한 적이 없었고 자신을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호(胡) 아저씨’로 불리면서 일생을 청빈하게



독신으로 살았다. 죽을 때는 옷 한 벌, 신 한 켤레만 남기고 죽었다.

 

 


마치 메뚜기와 코끼리 사이의 싸움에 비유할 수 있을 베트남과 미국간의 전쟁에서



베트남이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 호지명의 인격과 지도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호(胡)가 베트남 국민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지와 신뢰를 받았느냐하면



남· 북 베트남이 서로 전쟁을 하던 중에도 호지명의 생일이 되면 적인 남쪽 월남에서도

 국민들이 가게 문을 닫고 그의 생일을 기릴 만큼 전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호지명의 사상을 간추려 말하자면 ‘3꿈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첫째는 함께 산다는 정신으로서의 ‘꿈일 정신’이다.

  

둘째는 함께 먹는다는 뜻으로서의 ‘꿈안 정신’이다.

 

셋째는 함께 일한다는 뜻으로서의 ‘꿈담 정신’이다.

 

 


지도자가 백성들과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일하는 공동체 정신을 삶으로

 

실천할 때에 온 국민의 역량이 통합되는 것이요, 어떤 난국도 극복하여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호지명은 그렇게 살았다. 그는 최고 지도자이었을 때에도 자신을

 

위해서 특권을 누리지 않았다. 국민들과 동고동락함으로써 이로써 쌓은 국민적

 

신뢰감을 바탕으로 국가통일까지 이루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게 하였다.

 

 

호지명이 당대에 온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어떤 경우에도 청렴결백 했던 삶의 자세 때문이었다.

 

둘째는 그가 교육입국(敎育立國)에의 비전을 품고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국가의

 앞날에 대비하였던 점이다.

  

셋째는 그가 힘없는 백성들과 함께 하고 소외된 계층을 항상 품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토록 얼마나 청렴했던가는 그의 죽음 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가 세상을 뜬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입었던 홑겹의 옷 한 벌,신발 한켤례 였다.

 

그리고 그는 죽음 직전에 자신의 장례식에 대하여 유언하기를

 

“국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화장으로 하라”고 일렀다.

 

 


 






호지명이 남긴 유언으로 

 

 첫째는 자신의 무덤을 만들지 말고 시신을 화장하라. 매장하여 무덤을 만들면

 인민들에게 폐를 끼치기 쉽고 또 우상화하거나 신격화 할 위험이 있노라 하였다.

 

 둘째는 이제 곧 전쟁이 끝날 터인데 전후 미국 편을 들었던 남월남의 누구도

 보복하지 말라. 모두가 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처신한 것이니 과거지사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모든 남녘 백성들을 새로운 통일국가의 새 국민으로 새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월맹공산당의 지도자. 호지명은 미국과의 전쟁시 북 월맹에 대한 북폭이 강화되여 전쟁수행에 난관이 닥치자 월맹공상당 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미국과의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방법을 토의하였던 것이다.
일부 군사지도자들은  같은 공산주의국가의 중국군과 소련군의 참전을 요청하자고 하였다.국제공산주의 동지자적인 입장에서 요청 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호지명은 이문제에 대한 토의조차 반대 하였던 것이다.
 
호지명은 같은 공산국가이지만 중국과 소련의 영토적인 침략성을 인식하여 이안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호지명은 주장하기를 중국과 소련은 원조를 이유로 일단 영토안에 그들의 군대가 개입하고 월남전에 관여 하면 종전후 그들은 절대로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 하였던 것이다. 적군인 미국제국주의군은 때가 되면 철수하지만 중국군과 소련군은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하였던 것이다.
              
그후 미국과의 전쟁이 종전되었다.그리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종전후 중국은 군사원조 국가로서 국경문제를 야기분쟁을 야기시키고 월맹정부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월맹이 거부하자 치열한 국경 전쟁이 터지고 중국은 인해전술로 국경을 돌파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결국 협상으로 해결 하였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로서 서로 치열한 국경 전쟁을 한 월맹 지도자인 호지명은 중국의 전통적인 침략성을 예지하였던 것이다. 월맹도 한국과 같은 수모와 치역을 수 백년간 중국으로 부터  당한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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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   표
                   
          높은 곳에 있지도
                    먼 곳에 있지도 않다.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니다.

                    그대는 그저 
                    큰 길가에 서 있는 
                    보잘 것 없는 이정표.


                    지나가는 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일러주어 
                    그들로 하여금 길을 잃지 않도록 해준다.

                    아직 길 위에 서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더 가야만 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대의 노고가 결코 가볍지 않으므로 
                    모두가 늘 그대를 기억 하게 되리라.


                    호치민(胡志明, ho chí minh. 1890.5.19 ~ 196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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