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내년 11월 반포근린공원에
독립운동·반독재투쟁 조명1927년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며 태연히 이런 시를 썼다. “가정도 생명도 돌보지 않았노라…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 그는 고문을 당하고도 치료를 거부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또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며 재판과 변호마저 거부해 14년 형을 받고 7년 동안 갇힌 몸이 됐다.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일생을 바친 심산 김창숙 선생 앞에는 ‘칼을 든 선비’ ‘조선의 기개를 지킨 선비’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의 뜻을 기리는 기념관이 내년 11월 반포근린공원에 들어선다.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의 기념관에는 선생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기념홀, 같은 시대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 ‘기획전시실’, 유학자로서 그의 면모를 되새기는 ‘유학자료실’ 등이 마련된다.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는 1일 착공식을 열고 “단재 신채호, 백범 김구와 함께 대표적인 항일 운동가로 꼽히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선생의 업적을 이제야 조명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2001년부터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으나 터와 건축비를 마련하지 못해왔다. 이번엔 건축비 172억원 가운데 77억원을 서초구에서, 45억원을 국가보훈처에서 내 사업이 성사됐다. 이명학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장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청빈하고 치열한 삶이었다”며 “기념관에 단순히 유물만 전시하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한문 고전을 배울 수 있는 ‘한학 교육실’이 들어가 더 뜻 깊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말 그대로 대쪽같았다.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난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1919년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에 천도교·기독교·불교 대표만 들어있고 유림 대표가 없자, 유림 130여명을 모아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고 대표를 보내는 1차 유림단 사건을 주도했다. 단재 신채호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1924년 만주와 몽골 접경 지역에 새로운 독립기지와 군사학교를 지으려고 자금을 모으다가 붙잡혀 1927년 투옥됐다. 1934년 출옥했으나 다시 갇혀 해방을 감옥에서 맞았다. 그의 세 아들 가운데 둘은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그의 투쟁은 계속됐다. 신탁통치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 투쟁을 벌였고, 1952년 봄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하야경고문’을 발표한 뒤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려다 부산형무소에 갇히기도 했다. 1946년 9월 성균관대를 설립해 초대 총장이 됐지만 반독재 투쟁을 벌인 일 때문에 물러나야 했다. 그는 여든이 넘어서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 투쟁을 벌이고, 효창공원의 김구 무덤을 먼 곳으로 옮기려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시도를 온 몸으로 막아냈다. 1962년 83살로 숨질 때 그에겐 집 한 칸이 없었다.
김소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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