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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김구에 못지않은 ‘조선의 기개를 지킨 마지막 巨儒 ’심산 김창숙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철두철미한 항일지사
 
친일청산 기사입력 :  2009/03/09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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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민중들이 본 받아야 할 영남유림 김창숙


김구.김창숙 선생
 
[자료]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철두철미한 항일지사로 흔히 단재 신채호와 백범 김구 , 그리고 심산 '김창숙'을 꼽는다.그러나 심산은 단재나 백범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땅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운다.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 사월리 의성 김씨 집성촌에서 영남 유림의 후손으로 태어나 1962년 여든 넷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며 한순간도 흐트러짐없이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심산 '김창숙'.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았다.

일본의 식민통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법을 무시했고, 항소도 변호사도 거부했다.
죽을 지언정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런 신념은 해방후에도 이어져 '민족통일운동'과 '반독재운동'을 거치면서 이승만정권을 비롯한 독재정권에 꼿꼿이 맞섰고 이로 인해 심한 고초를 겪었다.

두 아들마저 독립운동에 바친 그는 만년에 지독한 가난으로 병원비 조차 없이 서울 변두리 허름한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다, 62년 한 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살아 있을 때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으로 살았고,이로 인해 고난의 길을 걸었던 심산 '김창숙'.해방전후사 속의 민족정신 그리고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실천하는 지성으로서의 '마지막 선비'
 

反歸去來辭(반귀거래사) ; 심산 김창숙


(이하 펌 > 재구성)




(1962년 5월 5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병상을 찾은 당시 국가재건  최고 회의 의장 박정희)

김창숙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신 분이다.

그 분이 아무에게도 보살핌도 받지 못한채 (아들들과 가족들이 모두 독립운동/반독재운동하다가 경찰들에게 잡혀 죽었다.) 병원 골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자리인데, 1962년이니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박정희
가 정권을 잡은 후이다.

그 병실에 일본 관동군 출신에, 사이비 민족주의자였으며, 공산주의 동조자였고, 쿠데타 주동자였던 박정희가
나타났다.

그러자 당시 김창숙 선생은 박정희
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누웠다고 한다


反歸去來辭(반귀거래사) 중 일부


심산 김창숙


“......
앉은뱅이 되어서야 옥문 나서니
쑥밭된 집안 남은 거란 없어
......
음험하기 짝이 없는 못된 무리들
고향에도 날뜀을 봐야 했어라
해방되어 삼팔선 나라의 허리 끊고
그 더욱 슬펐기는 동족을 죽인 무덤!
......
남북을 가르는 흑풍 회오리
화평을 이룩할 기약은 없고
저기 저 사이비 군자들
맹세코 이 땅에서 쓸어 버리리.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랴.
......”



이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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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꺼나!



전원이 황폐한데 어디로 돌아 가나

조국 광복에 마친 몸

뼈가 가루가 된들 슬플까마는

모친상 당하고도 모른 이 몸

되돌리지 못하는 불효

눈물에 우네.

이역만리 갖은 풍상 다 겪으면서

나날이 그르쳐가는 큰 일(大業) 탄식하다가

문득 크디큰 모욕을 받아

죄수의 붉은 옷 몸에 걸치니

고생을 달게 받아 후회는 없지만

행여 길마음(道心) 쇠해질까 걱정했노라.

쇠사슬에 묶여 눈앞에 두고도 못 가던 고향

앉은뱅이 되어서야

옥문 나서니 쑥밭된 집안

남은 거란 없어 농사 아니 지으니

무엇 먹으며

빚을 수도 없는 술 어찌 마시리.

겨레붙이들도 그 모두 굶주리는 꼴

솟구치는 눈물에 얼굴 가리고

아내도 집도 없어진 이제

어느 겨를 내 한 몸의 안정 꾀하리

음험하기 짝이 없는 못된 무리들

고향에도 날뜀을 봐야 했어라.

해방되어 삼팔선 나라의 허리 끊고

그 더욱 슬펐기는 한겨레를 죽인 무덤!

더욱이 안타깝긴

모략받아 죄없이 죽어간 사람들

하늘 우러러 그 누가 돌아오리

아 죽어가는 병든 이 몸

아무리 둘러봐야 한 치의 땅도 없네.

돌아갈꺼나! 돌아가

누리(世上)와의 연 끊을꺼나

누리 멸시하는 것 아니어도

부귀영화 너 뜻 아니어라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아직 창창해

나라 일 안타깝네.

옛 일꾼들 불러봐도 오지 않으니

갈녘들에 밭갈 일 누구와 이야기하리.

물결에 몰아치는 바람 사나워

외로운 배 노마저 꺾이었구나.

저기 저 치솟는 건 무슨 산인고?

머리 두고 내가 죽은 고향쪽 언덕.

강대를 그리면서 못 가는 세월

물 같이 흐름은 빠르기도 해라.

안타까이 청천 냇물

손에 떠 들며 목늘여 어정이느니

늘그막에 편히 좀 쉬었으면 싶어도

비웃고 조롱하는 나쁜 무리들

나로 하여 고향에 머물게도 안해라

그 어찌 마음 조여 갈 곳 몰라 함이여.

남북을 가르는 검은 회오리바람

화평을 이룩할 기약은 없고

저기 저 사이비 군자들

맹세코 이 땅에서 쓸어 버리리.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랴.

가만히 외어보는 위후의 억시*

해처럼 밝은 마음을 쫓아

귀신에게 물어도 떳떳하려 했노라.

* ≪시경≫ 대아大雅의 억抑은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안타까워 하며 주周 여왕厲王을 풍자하고 자신도 경계한 위衛 무공武公의 노래다.

중꿔 中國 진晋의 이름난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라 하네요. 도연명이 시골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한가로이 즐긴 일과는 반대로 심산 선생(1879∼1962)은 시골에 돌아왔으나 끝내 조국의 현실을 잊지 못하는 마음을 읊은 것이라고 하네요.(심산사상연구회 편 1981 ≪김창숙≫, 한길사, 67∼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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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관 세운다

기사입력 2008-12-01 22:15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내년 11월 반포근린공원에

독립운동·반독재투쟁 조명


1927년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며 태연히 이런 시를 썼다. “가정도 생명도 돌보지 않았노라…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 그는 고문을 당하고도 치료를 거부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또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며 재판과 변호마저 거부해 14년 형을 받고 7년 동안 갇힌 몸이 됐다.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일생을 바친 심산 김창숙 선생 앞에는 ‘칼을 든 선비’ ‘조선의 기개를 지킨 선비’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의 뜻을 기리는 기념관이 내년 11월 반포근린공원에 들어선다.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의 기념관에는 선생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기념홀, 같은 시대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 ‘기획전시실’, 유학자로서 그의 면모를 되새기는 ‘유학자료실’ 등이 마련된다.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는 1일 착공식을 열고 “단재 신채호, 백범 김구와 함께 대표적인 항일 운동가로 꼽히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선생의 업적을 이제야 조명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2001년부터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으나 터와 건축비를 마련하지 못해왔다. 이번엔 건축비 172억원 가운데 77억원을 서초구에서, 45억원을 국가보훈처에서 내 사업이 성사됐다. 이명학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장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청빈하고 치열한 삶이었다”며 “기념관에 단순히 유물만 전시하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한문 고전을 배울 수 있는 ‘한학 교육실’이 들어가 더 뜻 깊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말 그대로 대쪽같았다.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난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1919년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에 천도교·기독교·불교 대표만 들어있고 유림 대표가 없자, 유림 130여명을 모아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고 대표를 보내는 1차 유림단 사건을 주도했다. 단재 신채호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1924년 만주와 몽골 접경 지역에 새로운 독립기지와 군사학교를 지으려고 자금을 모으다가 붙잡혀 1927년 투옥됐다. 1934년 출옥했으나 다시 갇혀 해방을 감옥에서 맞았다. 그의 세 아들 가운데 둘은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그의 투쟁은 계속됐다. 신탁통치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 투쟁을 벌였고, 1952년 봄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하야경고문’을 발표한 뒤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려다 부산형무소에 갇히기도 했다. 1946년 9월 성균관대를 설립해 초대 총장이 됐지만 반독재 투쟁을 벌인 일 때문에 물러나야 했다. 그는 여든이 넘어서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 투쟁을 벌이고, 효창공원의 김구 무덤을 먼 곳으로 옮기려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시도를 온 몸으로 막아냈다. 1962년 83살로 숨질 때 그에겐 집 한 칸이 없었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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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심산 김창숙선생 46주기 추모제전

기사입력 2008-05-10 11:56


(서울=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10일 오전 서울 수유동 묘소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 46주기 추모제전'이 열리고 있다. 심산 김창숙 선생(1879-1962)은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성균관대의 중흥에 힘썼다.

jihopark@yna.co.kr/2008-05-10 11: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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